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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Mar 29. 2017

승재의 생일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승재가 오는 시간입니다. 신랑과 저는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서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가 몸을 일으켜 씻고 승재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화장실 앞에 있던 빨래건조대를 안방으로 숨기고, 신발장을 정리하고, 베란다에 있던 보면대를 거실로 꺼내놓으면 승재를 맞을 준비가 완료됩니다. 벨이 울리는 소리에 현관 문을 열면 승재가 벽면에 등을 붙이고 서있습니다. 알아서 찾아가 보라고 아빠가 1층에서 혼자 올려보내신 거죠.

승재는 자폐를 가진, 매주 우리집에 바이올린을 배우러 오는 키 크고 잘생긴 아이입니다. 아버님 말씀으로는 당신이 학생이던 때 성악 교수님이 집으로 찾아와 이 학생을 가르치겠다고 했던 재능이 아들에게 간 것 같다고 하실 만큼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악기를 배우는 중에도 끊임 없이 다양한 노래 제목을 이야기하고, 주의가 흐트러진다 싶으면 제가 이런저런 노래를 연주해 주기도 하지요. 승재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이승기의 '결혼해줄래'입니다.

승재가 오면 신랑은 집에 없는 사람처럼 재빨리 방 안으로 몸을 숨깁니다. 아마 지금까지 승재도 집에는 선생님 혼자 밖에 없는 줄 알았던 모양이죠. 그런데 몇주 전 신랑이 방에 조용히 잘 있다가 새어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그만 재채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승재가 깜짝 놀라 외칩니다. "형아? 형아 있어?" 말릴 새도 없이 소리가 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통에 팬티 바람으로 방에 있던 신랑도 깜짝 놀라 얼른 방문을 잠궈버렸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은 승재의 생일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오셔서 가족 식사 자리에 신랑과 같이 초대해 주셨네요.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열심히 고른 티셔츠 선물을 들고 생일 파티에 갔습니다. 방 안에만 숨어있던 '형아'가 드디어 첫 모습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멋고 나온 승재에게 "승재야 여기 형아도 같이 왔어" 하니 정작 승재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채기 사건 다음 주에는 오자마자 "형아 있어?" 하고 찾았으면서요.

늘 승재를 데리고 다니시는 아버님과 신랑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이차는 많이 나지만, 신랑이 좋아하는 랩과 힙합을 비롯해 클래식, 락까지 모든 음악을 즐겨 들으신다고 하니 이거 참 꽤 대화가 되네요. 한때 힙합 꿈나무였던 신랑은 신이 나서 이야기 하고, 또 열심히 먹습니다. 앞으로는 승재가 바이올린을 배우는 동안 밖에 나가 계셨던 아버님과 방에 숨어 있었던 신랑이 아파트 테니스장에서 함께 테니스를 치기로 했습니다. 바람은 셌지만 햇볕이 따사로웠던 토요일 점심, 가족이 만나는 귀한 인연과 새롭게 얻은 에너지로 기분이 흐뭇해진 주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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