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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Apr 05. 2017

완벽한 하루

찜찜한 기분으로 시작한 하루였다. 오늘은 얼마 전부터 독립해 나와 살고 있는 여동생의 생일이다. 마침 우리 옆동네에 살고 있으니 저녁을 같이 먹자 연락했는데 엄마가 집에 오라 했다며 오늘은 안되겠다 한다. 내가 시집간 후 부쩍 가까워진 엄마와 여동생은 간혹 내 마음에 시샘과 찜찜함을 남긴다. 내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의지되는 큰딸이었는데.. 역할도 가장 많이, 사랑도 제일 많이 받고픈 장녀 컴플렉스인걸까. 가끔은 그게 싫어서 의도적으로 가족에게 거리를 두면서도, 또 그래놓고 나면 나를 빼고 뭉친 것 같은 소외감에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 자문할 때가 있다.


찜찜한 기분이 풀리지 않은 채로 아침 수영을 다녀오는데, 개나리가 만발한 아파트 단지에서 어떤 할머니가 "아가씨"(!)하고 나를 불러 세우신다. 꽃이 너무 예쁘다며 사진 좀 찍어줄 수 있겠냐고. 할머니걷는데 사용하시는 보조기구를 살포시 내려놓고 개나리 앞에 수줍게 맞춰 서신다. 받아든 핸드폰은 정말 오랜만에 만져보는 폴더폰이라 카메라 기능을 찾는데 한참 걸렸다. 이렇게 저렇게 네 장을 찍어드렸더니 좋아하시며 이 사진을 어떻게 보고, 저장할 수 있 물으신다. 본인이 글을 몰라 물어보는 거라 웃으시면서. 아. 훈훈하던 마음에 괜시리 살짝 뭉클함이 들어와 잠깐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어쩌면 살 날이 얼마 안남으신건가, 할머니니 지금껏 사신 날보다 사실 날이 덜 남은거야 당연하겠지, 아니 뭐 그런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꽃이 예뻐서 그러신 걸거야.


친한 동생네 가 밥 먹고 놀다오는 길, 아침부터 몇방울씩 내리던 비가 이제는 상당히 내리고 있는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손에는 빌린 우산을 받치고, 한손에는 염치없이 받아든 토마토 봉지를 가까스로 든  바쁜 걸음으로 집에 온다. 오늘은 그동안 연체 때문에 묶여있던 도서관 대출이 드디어 풀리는 날이니까! 읽고 싶었던 책이 소장 중인 것을 확인하고 얼른 다녀오기 전에 어제부터 취미를 붙인 바이올린 연습을 한판 한다. 어두워지면 소음이 될테니 최대한 밝을 때 먼저 해야한다.


여기 산지 3년만에 알게 된 지름길로 도서관에 간다. 큰 나무가 옆따라 줄지어 있고, 쌓인 포대자루 마다에는 비에 떨어진 나뭇잎이 꽉꽉 들어차있다. 마치 힐링로드 같은, 이런 아름다운 길을 걷는 기분이 새삼 새롭고 또 놀랍다. 빌릴 수 있는 책은 다섯 권인데 얼떨결에 손에 잡아든 책은 여섯 권이니 얼른 여기서 한권을 읽어치워야겠다 싶어 엔도슈사쿠의 에세이집을 잡고 바쁘게 읽어내려간다. 소설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로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된 엔도슈사쿠는 종교 작가로 많이 알려져있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유머가 있으며 무엇보다 '나답게' 사는 것을 가장 중요히 여긴 '(작가이기 이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정말 별 생각 없이 펼쳐 책인데. 나는 이런 내용만 보면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아니 나는 얼마나 많은 틀들에 자신을 끼워맞추고 살다가 수많은 부작용을 얻게 된 것인지!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지고 엉덩이가 붕 뜬다. 그동안 무겁게 여겨졌던 일들도 가볍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뭐 그거 별거 아니니까.  


책 다섯 권을 한손에 안고 우산을 쓰고 다시 힐링로드를 걸어 집에 돌아가는 길, 비가 여전히 꽤 많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양껏 비가 내리는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숲속을 걷는 듯한 기분에 몇번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셔 이 공기에 흠뻑 젖어본다. 무슨 연관성인지, 아까 다녀온 동생네 집이 난데없이 아주 안정적인 가정으로 느껴지고, 이렇게 돌아가 저녁을 준비하며 사람 사는 재미를 마음껏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이 들떠 생전 안가보던 신랑 마중을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이 글 때문에 나가지 못할 것 같지만). 퇴근한 신랑과 김치덮밥 저녁을 먹으며 <윤식당> 2회를 보고, 어제부터 시작한 출판사 드라마를 보면 너무 재미있게 하루가 끝나겠지. 찜찜한 기분으로 시작했을지언정, 오늘은, 완벽한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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