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수소녀 Nov 05. 2017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이야기꾼의 조건

세상엔 많은 이야기꾼이 있습니다. 별로 재미 없는 이야기도, 말이 안되는 듯한 이야기도 이들이 말할 때 나도 모르게 빠져들지요. 남이 하면 재미 없을 이야기를 재미 있게 말하는 것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들리게 하는 것도 이야기꾼의 능력입니다.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에 나오는 이들은 이야기꾼의 자질을 갖고 있거나 그 언저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출판 비즈니스 성공한 사업가의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는 젊은 시절 작가 지망생이었고, 그의 불륜 상대인 아름다운 여인은 이야기를 알아볼 줄 아는 편집자이죠. 글 쓰는 것을 싫어하던 아버지의 반대로 평범한 진로를 선택한 아들은 '쓰고 싶' 욕망을 남몰래 간직한 젊은이 입니다. 그가 집에서 나와 살며 속을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한 옆집의 알콜 중독 아저씨는 알고 보니 꽤 유명한 필명을 쓰고 있는 작가였구요. 물론 이들을 한 판에 놓고 이리저리 엮어가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사실 가장 위에 있는 이야기꾼일 겁니다. 작가나 감독 등 이 영화의 제작자 말이죠.

영화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꾼의 조건은 먼저는 '말이 안되는 듯한 이야기를 말이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재밌게요. 아버지와 낯선 아름다운 여자의 애정 행각을 목격 후, 사실을 알게 되면 상처를 받을 심약한 어머니가 걱정된 아들은 아버지의 여자를 미행하기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엄마가 이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저들이 관계를 정리하게 해야 한다는 불타오르는 사명감이 있을 뿐이죠. 그런데 어이없게도 화려하고 섹시한 그 여인을 쫓다가 자기 자신이 그 여인의 잠자리 상대가 되고 맙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있던 젊은이가 순식간에 아버지의 애인과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설정이 황당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황당한 과정을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 이야기꾼의 역할입니다. 영화의 사 속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과 표정 연기로 표현해낸 배우들도 큰 몫을 하요.


이야기꾼의 두번째 조건은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이야기 속에 심어놓는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전이 등장하기 전 인물들의 관계와 각 캐릭터를 관객이 있는 그대로 철썩같이 믿고 있게 만들어야 하죠.  평이하고 당연해 보이는 관계에 별 의심이 없던 관객은 영화 중반 이후 핵심 관계가 뒤집어진 반전 속에서 급하게 머리를 되돌리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봐왔던 내용을 반추하고 지금의 상황에 끼워맞춰보느라 관객의 머릿속은 순간 바빠지고 감정의 진폭은 커집니다. 앞의 장치들이 당연하고 일관되었을수록 뒤에서 느끼는 반전의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지요.


두가지 조건을 포괄하는 이야기꾼의 세번째 조건은 아마도 '인간의 다면성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반전이 있다는 것은 인물들이 예기치 못했던 행동을 했다는 것이고, 등장 인물들의 말이 안되는 듯한 행동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인물이 예측 가능한 캐릭터의 속성에 갇히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면과, 그가 벌이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오며 품은 다양한 과거는 이를 꿰뚫어 본 이야기꾼의 상상력을 만나 하나의 풍성하고 재미진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었던 메시지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없으면 어떤가요? 때로는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꾼은 제 몫을 다한 법인데요.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더 테이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