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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Apr 23. 2018

영화 <소공녀>

집이 없다고 취향을 버릴쏘냐

가사도우미로 일한지 2년이 된 그녀는 조그만 월세방에 산다. 바퀴벌레가 벽을 기는 방엔 변변한 가구 하나 없어서 주황색 캐리어가 식탁이 되고 책상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남자친구와 사랑을 나누려 해도 너무 추워서 벗던 옷을 다시 입게 만드는 철계단 위의 춥고 허름한 집. 그녀가 친구의 집을 구석구석 쓸고 닦아 하루 일당으로 받는 돈은 4만 5천원인데, 그녀가 사랑하는 담배와 위스키 한 잔의 값에 하루 1만원격인 방세 더하면 늘상 일당을 넘어선 지출이 되기 일쑤다.

어느날 집주인이 방세를 올려달라고 한다. 자기의 집주인도 세를 올려서 어쩔 수 없다면서 그녀에게 요구한 돈은 월 5만원. 큰 돈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녀에겐 너무나 큰 돈이다. 그렇다고 담배와 위스키 값을 줄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유일한 삶의 즐거움이자 그녀의 '사랑하는 취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감히 한 가지를 포기하기로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집이었다. 쓸데없이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고, 이만큼 벌면 저어만큼 올라버리는 돈을 감당해야 하는 집 말이다.


그녀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재워달라는 명분 하에 추억의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나서기로. 비록 대학을 중퇴하긴 했지만 한때는 누구보다 뜨겁고 재밌는 밴드 생활을 했던 추억이 있다. 그 친구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는 곧 집을 비워 짐을 끌고 한명 한명씩 찾아나선다.

키보드, 기타, 보컬, 드럼..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는 그때 그 친구들은 사는 것도 제각각이다. 더 큰 회사로 가기 위해 점심시간에 직접 링겔을 꽂아가며 일하는 친구, 불행한 결혼생활로 밤마다 방구석의 키보드를 어루만지며 눈물 흘리는 친구, 반짝반짝한 아파트에 살지만 밤마다 방에 틀어박혀 술로 밤을 지내는 동생, 저택같은 큰집 속에서도 왠지 공허함이 느껴지는 언니. 밴드 시절 그녀의 작은 방엔 언제든 친구들이 와서 놀고 자고 갔건만 이젠 다 각자의 사정이 있어서 그네들의 집에 오래 머무르진 못한다. 오늘 밤 잘 곳이 마땅치 않을 때면 그녀는 짐을 옆에 두고 24시간 카페에 엎드려 잠을 청한다. 그래도 그녀는 낙담하지 않는다. 그저 여행을 하고 있는 거니까.


어떤 이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열심히 벌어 잠자리 정도는 마련했어야 할 시기에 그냥 보고싶어 찾아왔다는 그녀에게 넌 여전하다고 말하고, 남의 집에 무작정 찾아와 오래 있는게 염치가 없는 것인 줄 왜 모르느냐고 독한 말로 상처를 주는 이도 있다. 남에게 잠자리도 빌 정도라면 술담배를 먼저 끊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돈으로 그녀를 쫓아보내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 곳을 청할지언정 그녀는 한 번도 자존감을 잃은 적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찾아갈 때면 빈손이 아닌 계란 한판씩을 사들고 찾아갔고,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며 청소와 음식을 싹 해놓고 나온 그녀였다. 집을 떠나올 때면 옛적 사진과 마음이 담긴 메모로 오히려 추억을 안겨주고 나왔던 그녀다. 그녀의 진가는 자기가 일하던 집의 주인을 대하는 자세에서 스스럼 없이 드러난다. 임신을 했는데 아이 아빠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흐느끼는 집 주인에게 헤픈게 왜 나쁘냐며 담담히 바라봐주는 그녀의 얼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꺼리는 것이 하나도 없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인 그녀의 얼굴을. 아마도 그녀는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살고,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 줄 알며, 마음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리라. 비록 집은 없더라도 생각과 취향은 확고하게 지켜나가고, 자신의 직업을 당당하게 말하며, 타인에게 공감하는 따뜻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그녀를 누가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녀는 가장 풍요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남들이 사는 만큼 살아가기 위해 개인의 취향을 포기하며 산다. 우리는 '집'으로 대변되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각자 고유의 개성과 향마저  버려가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무색무취의 사람들이 되어가면서 얻어낸 삶의 환경들에 둘러싸여 영화 속 주인공이 무모하고 철없다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영화에 넘쳐나는 무심한 듯 뼈있는 대사들은 힘겹게 달성한 우리들의 삶 이면에 있는 것들을 까발려준다.  


"주인님 저 집 뺄게요"
"5만원 올렸다고 이러는거니?"
"이것저것이 올라가니 어쩔 수 없네요."


"누나 여긴 집이 아니고 감옥이야. 여긴 못벗어나. 여기 한달 이자가 얼만줄 알아? 원금 포함해서 100만원이다. 근데 월급이 190이거든. 그걸 얼마나 내야되는줄 알어? 20년이야 20년"


"너 학자금대출 다 갚았어?"
"아니"
"근데 무슨 빚이야 나 빚지는 거 싫어"


서울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들과 한강변 아파트의 불빛들, 익숙한 도시 전경 속에서 영화 말미 그녀가 택한 삶의 공간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텐트 하나이다. 끝까지 '미소'라는 개인으로 살기 위해 담배와 위스키 취향을 버리지 않았던 소공녀(小空女, Microhabitant)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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