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마중하는 길, 길마중길 걷기
불금 도시 걷기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亀は意外と速く泳ぐ, 2005년 , 미키 사토시 감독)" 란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일상물을 가장한 첩보물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영화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을 때 추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이 스파이 모집 광고를 발견한다. 연락해 보니 진짜 스파이 모집이었다. 면접자는 주인공의 평범함에 적격이라며 바로 합격! 거금의 공작금을 내어주고 연락을 기다리라 한다.
이후 주인공에게 평범하던 일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할 일 없이 파칭코에서 시간을 보내던 평범한 남자, 보통 맛의 라면 가게 주인, 마을에 하나쯤 있는 흔한 두부 가게 주인, 실은 모두 베테랑 스파이였던 것이다. 특히 뛰어난 음식솜씨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맛있지도 그렇다고 맛없지도 않은 육수를 만들기 노력하는 라면 가게 주인의 이야기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웃겨서)
금요일 밤, 퇴근 후 걸어볼까요?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다. 산 길과 달리 도시 길은 미리 준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고파서 남의 가방을 뒤지지 않을 만큼의 간식, 비상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방한 용품같은 것 말이다. 문제는 복장이었다. 금요일 밤 클럽도 아닌 길에서 눈에띄지 않으려면 무엇을 입어야 하나...
산책이니 레깅스룩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불금(Time)에 신사동 어디쯤(Place)에서 막걸리 마실(Occasion) 생각에 이르니, 모르는 사람의 적개심까지 불러이르킬 레깅스 복장은 넣어두기로 했다. 등산복은 어떨까? 편하긴 한데 양재동 1번 출구 산악회 버스앞이 아니라면, 역시 눈에 띌것 같았다. 고심끝에 걷기 편하면서,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막걸리집에서 받아줄만한 복장을 선택했다. 츄리닝과 뽀그리로 치장한 동네마켓룩이었다. 전략적 보통으로 말이다.
이번에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 분은 '느리게걷기' 맴버이자 동네 주민이시다. 걷기 힘든 곳은 피해서, 길이 끊어지지 않게 마치 인생 네비 같이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가 걷는 길은 2010년부터 서초구가 한강시민공원에서 청계산까지 연결하여 조성한 걷기 길의 일부이다. 남부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는 서초구 구간은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을 마중하는 길이라 하여 '길마중 길' 이라 했단다. 그 길로 떠나는 사람도 있을텐데 건너편은 길배웅 길이라고... (상상해본다.) 길 마중길을 따라 걷다보면, 고즈넉한 산책길이 이어지다가, 도시 야경이 펼쳐지고 가끔은 재건축을 기다리는아파트 단지도 보인다. 서울다운 풍경이지 싶다.
서울이니까, 장수막걸리를 주문했다. 오랫만에 시켜보는 서울 막걸리, 언제든 쉽게 마실 수 있어서, 늘 다른 막걸리를 주문했던것 같다. 우리는 눈치없이 홀로 나온 막걸리를 휘휘 돌려 섞고, 걷기 피로를 안주삼아 한 잔 들이켰다. 시원하고 깔끔하고 단백했다. 장수 막걸리가 이런 맛있었가?! 어떤 막걸리보다 잘 어울렸다. 이 녀석도 사람 많고 시끄러운 서울에서 눈에 띄지 않려으려는 전략적인 보통을 선택한 건 아닐까 싶다. 그래, 서울에서 지쳤다면 보통의 미덕, 서울 막걸리를 마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