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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PD 업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일을 대하는 자세

by 김선혜

‘웹디자이너’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채널이 PC 웹만 있던 시절이라 ‘웹’이란 타이틀이 붙은 건 알겠는데 왜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웹 초창기 열악한 환경에서 회사 내 1인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다보니 말이 ‘디자이너’지 기획, UI 디자인, GUI 디자인, 인터랙션 디자인, 웹 퍼블리싱, 여차하면 영상 편집까지, 개발 빼고는 왠만한 일은 혼자서 다 처리했다. 그 당시엔 다들 그렇게 일하는 분위기였고,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도 않았고, 전문화되지도 않아서 조금만 배우면 왠만한 건 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시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모든 일들을 다 하는데도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재미있어서 야근을 자처하기 일쑤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걸 다 하라고 한다면—다 할 수도 없겠지만—3초만에 ‘3요’가 터져 나오지 않을까? 이걸요? 제가요? 왜요?



본격적인 PC 웹 플랫폼 시대로 접어들면서 업무가 조금씩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2년 정도 닥치는대로 열심히 일을 하니, 소규모이긴 해도 높디 높은 에이전시의 진입장벽을 뚫고 첫 입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 이후로는 좀 더 규모있는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더 이상 내가 모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기획자’라는 타이틀로 불리우며 클라이언트 기반의 프로젝트를 하기 시작했고, 규모는 작았지만 기획자, 디자이너, 퍼블리셔, 프로그래머가 팀을 이루어 작업을 하다 보니 팀을 대표하는 사람, 즉 프로젝트 매니저(PM)이란 타이틀도 이 즈음에 탄생했다. ‘프로젝트 매니저(PM)면서 기획자’의 역할을 겸하다 보니 야근은 기본, 철야를 밥먹듯이 했지만, 이정도 1인 2역은 내 커리어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고 밤낮없이 열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2008년,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꾼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스마트폰이라는 디바이스의 탄생은 개인적인 삶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업에 있어서도 대대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손바닥만한 스크린에 디자인을 해야 하는 일대 변혁이 일어나면서 ‘서비스 디자인’, ‘UX 디자인’이라는 트렌트 아닌 트렌드가 생겨났고, 이러한 트렌드에 발맞춰 조직내에 기획자라 불리우던 사람들이 ‘서비스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았다가 ‘UX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로 한 번 더 갈아타게 되었다. 물론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처음에는 너무 어색해서 내 스스로를 UX 디자이너라고 부르기까지 적응 기간이 좀 필요하긴 했다. 지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UX 디자이너예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꼬리표, 프로젝트 매니저의 역할은 변함없이 해야만 하는 역할이고,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디자인 업계에서는 기획자 또는 UX 디자이너가 해야 하는 역할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뭔가 기획자를 명명하는 타이틀이 계속 변해왔는데 그럼 업무의 변화는 있었을까? 물론 웹 초창기보다는 프로젝트 단계별로 해야 하는 태스크가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고, 그에 따라 UX 디자이너의 역할(Role), 책임(Role), 역량(Skill), 산출물(Deliverable)에 대한 표준화를 하려는 시도가 계속 되어왔다. 그리고, 업계에서도 UX 디자이너들에게 요구하는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 와중에 ‘AI’ 상용화가 확산되면서 모두의 근심거리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자이너들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도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프로젝트 조직 기반의 직책, 직무, R&R


업의 경계가 모호한 교집합은 이전에도 있었고, 회사마다 조직 구조가 상이하여 어떤 조직에서는 리서치와 전략 수립이 UX 디자이너의 역할이지만 또 다른 조직에서는 유저 플로우와 정보/화면설계(PPT)의 영역만을 UX 디자이너의 일로 규정짓는 곳도 있고, 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조직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UI 디자인과 동일한 화면설계에 대한 업무의 경계가 어떤 툴을 쓰느냐로—PPT로 화면설계를 그리면 UX 디자이너, 포토샵/스케치/피그마로 UI 디자인을 하면 UI 디자이너—나뉘는 코미디같은 상황도 여전히 존재한다. 리서치와 전략 수립 부서가 별도로 있다고 하더라도 UX 디자이너와 UI 디자이너가 조사/분석을 일도 하지 않나, 전략에 일도 관여가 없나라고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그럼 프로젝트 매니저는 정말 매니징만 하나? 그럼 참 좋을 것 같은데 UXUI를 관장하는 프로젝트에서 프로젝트 매니저의 역할은 관리 관점에서의 범위/인력/원가/일정/품질/변경/위험/이해관계자/의사소통 관리뿐만 아니라 업무 디렉터와 팀원들을 케어하는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 코에 걸면 코걸리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업의 경계가 모호해진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그동안 경계없이 오지랖 넓게 일을 하다 보니 요즘 자주 듣게 되는 프로덕트 매니저(PM), 프로덕트 디자인(PD)라는 레이블도 개인적으로는 MZ세대같은 마케팅 용어처럼 느껴진다. 그럼 프로젝트 매니저(PM)와 세상 헤깔리게 만드는 프로덕트 매니저(PM or PdM)의 정체는 뭘까? 가장 핵심적인 업무는 프로덕트의 생애주기를 관장하는 전략가의 역할이다. 프로덕트의 출시, 성장, 성과 전략과 제품 로드맵을 관장하고, 비즈니스 목표, 서비스 제공자와 사용자의 니즈를 이해하고 제품 방향성, 전략 수립, 기획을 주도하는 것이 PM의 주된 역할이다. 즉, 왜 만들지(WHY), 어떻게 만들지(HOW)를 관장하는 것이 PM(프러덕트 매니저)의 역할이라면, 무엇을 만들지(WHAT)는 PD(프러덕트 디자이너)의 역할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회사에 따라 PM와 PO(Product Owner)가 분리되어 있기도 하고, 합쳐진 역할로 존재하는 조직도 있다. 프로덕트 오너는 프로덕트의 백로그를 관리하며 프로덕트를 디벨롭하는 실행 개발 중심의 업무를 관장한다고 볼 수 있지만 조직에 따라 전략 중심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C레벨이 PO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냥 탐험가가 돼야 해요.

탐험가에게 모든 건 장애물이 아니라, 과속 방지턱일 뿐이죠."

(마크 바로카스 샤크닌자 CEO, 2025년 Masters of Scale 팟캐스트에서)


AI가 내 밥그릇을 위협하는 마당에 UXUI 디자이너니 PM/PD니 이 땅 따먹기하는 것 같은 상황은 또 뭔가 싶겠지만 이전에 나를 뭐라 불렀건 앞으로 또 뭐라 부르건 레이블엔 신경쓰지 말자. 내 업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집중하면 이 또한 지나갈 또 하나의 흐름, 장애물이 아니라 과속 방지턱일 뿐.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건 문제를 발견하고 솔루션을 만들고, 솔루션이 잘 작동하는지 검증하면서 페인 포인트를 만족 포인트로 바꿔 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더해 사용 경험에 재미를 더하고, 의미를 발견하고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열망 포인트 또한 충족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하는 것이 진정 우리가 해야 하는 변하지 않는 업의 본질이 아닐까.

기획자, 프로젝트 매니저, UX 디자이너, UI 디자이너, 프로덕트 매니저, 프로덕트 오너, 프로덕트 디자이너… 앞으로 또 어떤 이름으로 불리우시던 간에 과속 방지턱 넘나들 듯 자유롭게 업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유연한 프로페셔널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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