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無謀)한 어린이

고작 반생을 살았네

by 김선혜

어린 시절 기억은 주입된 기억 반, 드문드문 생각나는 기억 반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생각나는 기억도 제대로 된 기억인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정말 세상 겁없는 무모한 아이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서슴없이 물어보고, 누가 뭘 물어보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일단 무조건 반사처럼 답이 튀어나왔다. 두 손 두 발이 허용한다면 어디든 기어 올라가고 메달리고 뛰어내렸다. 걸어다닌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항상 뛰어 다녔던 것으로 보이며, 그만큼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내 무릎은 성할 날이 없었다. 인간의 자연 치유 능력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했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나름 대범(?)한 면도 있어서 마을 뒷 산에 출몰하는 귀신을 잡겠다고 친구들을 소집해서 산에 올라가 알 수 없는 동물의 발자국을 추적하다 난생 처음 무덤을 보고 까무라치게 놀라 뒤도 안 돌아보고 그 길로 달려 내려왔던 웃픈 기억도 있고, 어린이 여름 캠프에서 오밤중에 거행했던 담력 훈련에서 귀신 선생님들을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귀신의 집에 입성하여 깃발을 뽑아 들고 금의환향했던 늠름한 모습도 기억난다.


세상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니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당당하고 가장 거침없고 가장 무모했던 시절, 기억은 흐릿하지만 행복했던 느낌만큼은 선명히 남아 있다. 한동안 잊고 지낸 적도 있었다. 아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야생처럼 지내던 어린아이가 사회 생활이란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문화적 충격을 느꼈을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나름 적응해 나간거라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힘들 때마다 문득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것을 보면 아직 내 안에 무모한 어린 내가 웅크리고 앉아 다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내게 정답만을 말할 것을 강요했고, 남들이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 비정상적인 거라고 주입시켰고, 사회가 만든 일반화된 마일스톤에 내 인생을 끼워맞추려 했다. 그 길을 벗어나면 낭떠리지로 떨어져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심어줬다. 그리하여 무모한 어린이는 어느덧 바른 생활을 하는 어린이가 되어 갔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을 때가 없어 비밀 일기장과 대화를 하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정답이란 게 없는데 뭘 그렇게 정답을 찾으라고 하는 거지?

떨어지면 다시 기어 올라오면 되잖아, 늘상 하던 게 메달리고 기어오르고, 두 발로 땅을 밟고 있었던 기억이 그닥 없었던 것 같은데?

상처가 나도 자연 치유가 가능한데, 쉴새 없이 몰아치니 치유되기도 전에 자꾸 또 상처가 나서 낫질 않아요!!


고작 반생을 살고 나니 남은 반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모한 어린 내가 나에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이제 적당히 세상도 경험했으니 이제 적당히 무모해져도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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