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반생을 살았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부산에서 태어났다 한다. 2살부터 대구에 살았다고 하는데 기억나는 건 집 앞 가게에서 10원의 행복을 누리던 6~7살 시절부터인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초반까지 대구에서 살다가 강구항에서 인생에서 잊지못할 2년을 보내고 6학년 초반 서울로 전학을 왔다. 대구에서 강구로 전학을 갔을 때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도시 소녀가 된 듯한 기분이었는데, 강구에서 서울로의 전학온 1986년은 어린 나에게 세상의 권력 구조를 몸소 체험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폭력으로 교실 내의 부당함을 평정한, 꼬꼬무(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같은 내 인생 역사에 한 획을 긋게 한 해였다.
바닷 바람과 햇살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그날 따라 왜 나는 하얀 원피스를 입었던가, 게다가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화장실에서나 신을 법한 핑크색 플라스틱 슬리퍼. 나름 전학 첫 날이라 제법 꽃단장을 했는데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컬쳐 쇼크 그 자체였다. 일단 얼굴색부터 인종의 격차가 느껴졌고, 옷은 둘째치고 아이들의 하얀색 실내화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거 완전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맘 같아선 핑크색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교실문을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나는 이성적 사고와 자아 인식 능력이 있는 인간이므로 본능으로 행동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리하여 조용히 배정받은 자리에 앉았는데 나의 비폭력 저항에 불씨를 당긴 사건이 바로 그날 발생했다. 당시 학교 내에서 그룹 활동을 장려하던 시기라 6명이 한 조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리 배치가 되어 있었는데, 나와 한 조가 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고 공부벌레처럼 뿔테 안경을 쓴 남자 아이가 나를 무시하는 눈빛과 말투로 선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학폭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언행이었지만 당시 13년 인생사에서 이런 모욕적인 경험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성격 같아서는 당장 주먹이 나갔을 터인데… 나는 이성적 사고와 자아 인식 능력이 있는 인간이므로 ‘나마스테…’ 애써 화를 억누르며 짱구를 굴려 보았다.
1. 서울말을 마스터한다.
2. 서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한다.
3. 공부를 열심히 해서 XX 코를 납작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타고난 뛰어난 환경 적응 능력으로 나는 순식간에 ‘서울 깍쟁이’가 되었고, 전학와서 본 첫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XX를 사뿐히 즈려밟고 교실을 평정했다. 어찌보면 초등학생의 한낯 웃픈 이벤트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공부로 판가름 되는 교내 권력을 공부와 무관하게 다 같이 어울려 생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니 힘들지만 그래도 의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변화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울 언니의 고백을 통해 깨달았는데, 중학교 전학 문제로 강구에서 좀 더 늦게 상경한 나의 언니는 말로만 듣던 ‘서울 깍쟁이’를 매일 얼굴 맞대고 사는 동생을 통해 직접 경험하며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언니가 경상도 사투리로 입을 뻥긋 할 때마다 도끼눈을 뜨고 사투리 쓰지 말라고 협박을 했다고 증언을 하는데, “내가? 정말 그랬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근데 진짜로 기억이 안 난다) 변론을 하며 지금은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당시 12살 어린 아이가 순식간에 ‘서울 깍쟁이’로 변신할 수 밖에 없었던 외로운 생존 투쟁을 떠올려 보면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도 든다.
서울, 서울이 뭐라고 우리는 서울, 서울, 서울하는 걸까?
서울이 살기 편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이 살기 좋은 곳인지는 모르겠다.
하늘을 찌를 듯 빡빡하게 들어찬 고층 빌딩과 아파트, 거미줄 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하철과 철도, 도로에서의 안전거리 미확보는 이미 암묵적 합의가 된지 오래고, 출퇴근 시간 우루루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조금의 우왕좌왕도 허용되지 않는다. 치열한 서울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깍쟁이가 양산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서울이라는 공간, 조금만 더 여유롭고 할랑해 질 수는 없을까?
그럼 우리 마음도 조금 더 여유롭고 말랭해 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