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반생을 살았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은 다양하다. 그림을 잘 그리면 미대를, 피아노를 잘 치면 음대를 간다는 고정관념에서만 탈피하면 오히려 좋아하는 것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지속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시점이 되면 미련없이 그만 둘 수도 있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갈 수도 있다. 전공으로 밥벌이나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 위한 타이틀을 취득해야 한다거나 전공과 관련된 인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구지 “대학 전공”이라는 틀에 나를 가둘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연극영화과의 꿈을 연극 동아리에서 펼쳐 보리라, 내 안에 잠재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만나는 색다른 경험을 해보리라, 모노드라마 같은 내 인생 무대를 잠시 벗어나 다른 무대에 나를 던져 보리라는 생각으로 연극 동아리에 문을 두드렸다.
명색이 연극 동아리인데 나름 오디션이라는 선발 과정이 있지 않을까? 기대 반, 부담 반, 설렘과 떨리는 마음으로 동아리 방을 찾아갔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선배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는 것이 아닌가. 3학년 선배가 4명, 2학년 선배가 1명, 1학년은 지원자가 나를 포함하여 딸랑 2명. 캠퍼스 잔디밭에 누워 낭만을 즐기는 모습을 드라마에서 보고 대학에 가면 제일 먼저 캠퍼스 잔디밭에 몸을 던져 보리라.. 잔뜩 품은 기대가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경고판을 보는 순간 순삭된 것 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동아리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연극 동아리에 덜컥 붙어버렸다.
나에게 주어진 첫 역할은 1인 2역 단역 배우. 소시오 패스에 가까운 공감 능력 1도 없는 정신 병동 인턴역과 보이스 피싱도 울고 갈 능글능글한 사기꾼 아저씨역이었다. 남자 역할을 해야 했기에 머리도 숏컷으로 자르고, 유행 지난 아빠 양복에 넥타이를 걸치고, 생물학과가 이렇게도 도움이 되는구나.. 실험복을 의사 가운처럼 입고 무대 위의 성격 파탄자로 다시 태어났다. 연기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2회에 걸친 공연은 막을 내렸고, 그 후로는 배우가 아닌 프로듀서를 맡아 자금 확보를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며 돌아다녔고, 음악감독을 맡아 심금을 울리는 재즈 선곡과 더불어 더블 데크 카세트 테이프를 놓고 볼륨 컨트롤의 진수를 보여 주었고, 조연출을 맡아 연극이 완성되어 가는 전과정을 함께 하고 연극이 끝나고 난 후 무대 뒤에서 느끼는 벅찬 감정 또한 만끽해 보았다.
그리고 찾아온 마지막 정기공연. 캐릭터가 극명하게 다른 4명의 여인들이 나오는 연극에서 주연을 맡아 인생일대의 잊지 못할 메소드 연기에 빠져드는 경험을 했다. 메소드 연기를 공부한 것도 아니고, 구지 메소드 연기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한 회, 한 회 공연을 거듭할수록 묘하게 캐릭터에 점점 빠져들더니 급기야 마지막 공연에서는 완전히 그녀가 되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내면을 꽁꽁 둘러싸고 있던 철옹성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단단히 봉인되어 있던 판도라 상자가 열리며 내 안의 온갖 감정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천상을 유영하며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자유로움과 해방감!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로도 이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때의 그 느낌이 생생하다. 그리고, 가끔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다가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그 시절 판도라의 상자를 탈출한 내 영혼을 다시 찾아 데려오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떤 이야기로 쓰여졌을까? 어쩌면 해피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