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니루 봉다리

고작 반생을 살았네 14화

by 김선혜

중학교 베프가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병문안을 갔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골반에 금이 갔는데 궁뎅이라 깁스도 못하고 침대에 얌전히 누워서 지내야 한단다. 걱정 반, 안심 반, 해맑은 얼굴로 웃픈 사연을 이야기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왜 궁뎅이에 깁스를 했을 때 벌어질 일에 대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걸까…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또 한명의 병문안자가 등장했다.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을 한다는 친구의 후배는 명함을 건네며 나에게 인사를 했고, 명함에 새겨져 있는 까만 비니루 봉다리가를 본 순간, 이거슨, 내가 가고 싶은 바로 그 회사가 아니던가.


웹디자이너로 입문 후 가고 싶은 회사가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가 바로 비니루 봉다리였다. 당시에는 플래시 디자인이 붐이었는데 크리에이티브가 넘쳐나는 모션 디자인을 잘 하는 회사였고, 이런 창의적인 조직에서 일할 수 있다면 아침에 절로 눈이 떠질 것 같은, 매일매일 크리에이티브 주스에 몸을 담그고 온천욕을 하는 기분이지 않을까? 나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그동안의 노력이 갸륵해서인지, 비니루 봉다리 명함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영화사에서 같이 일했던 선배 언니와 오랜만에 만나 근황 토크를 하다가 언니가 다니는 성당에 아는 오빠가 디자인 에이전시를 하는데 회사를 이직할 의향이 있으면 소개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회사가 바로 그 비니루 봉다리라니! 우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필연을 낳았으니 이 정도면 비니루 봉다리와 인연이 있다고 봐야겠지? 그리하여 정성스레 이력서를 준비해서 지원을 하고, 면접 날을 고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초조하지 않은 척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 이틀, 사흘… 시간만 흘러가고 기다리던 연락은 올 생각이 없다. 이럴 땐 그냥 칼을 빼들어야 한다. 모 아니면 도, 용기를 내어 먼저 전화를 했다. 죄송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다음날로 면접이 잡혔고, 그리고 내 이름 석자를 비니루 봉다리에 새겨 넣게 되었다.


회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규모가 컸고, 온라인 디자인뿐만 아니라 브랜드와 편집 디자인까지 종합적인 디자인을 하는 에이전시였다. 당시 CGV 웹사이트 리뉴얼 제안을 하는데, 웹 디자인뿐만 아니라 CGV 로고, 팝콘컵과 같은 오프라인 용품들, 영화 다이어리와 영화 컨텐츠까지 제안할 수 있는 다양한 인재들로 구성된 멋진 곳이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재원과 자원이 있는 꿈꾸던 드림 웍스! 내가 이 곳의 멤버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야근을 해도 재밌고, 철야를 해도 재밌고, 뭘 해도 재밌는 1년이 훌쩍 지나가고 나니 배부른 욕심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 좋아하는 영화 프로젝트 한 번 못하고, 1년 넘도록 1318 대상 이통사 프로젝트만 징하게 하면서 알만 까다보니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갈증을 드림 웍스에서는 해결하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헤어질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 회사는 개인의 성장보다는 프로젝트의 안정과 회사의 성장만을 생각하는 걸까? 동반 성장과 상생을 기대하는 건 지나친 이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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