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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라이터 Sep 30. 2015

빵의 전설이 되고픈 빵셰프

라몽떼 오너 셰프 장은철

 좋아하는 음식이 ‘밥, 빵, 떡’인 나는 탄수화물홀릭이다. 고기를 입에 대지 않기 때문에 삼시 세 끼에 간식까지 탄수화물을 꼬박꼬박 섭취한다. 요즘에는 맛이 일률적인 프랜차이즈 빵집 대신, 000 파티셰, 000 셰프로 자칭하며 만드는 이의 색깔이 분명하게 녹아난 빵을 만드는 베이커리 샵이 자꾸 눈길이 간다. 

 

그러던 중 빵집 라몽떼를 알게 되었다. ‘빵사모’의 1인으로서 나는 주인장이 궁금해 광진구 자양동 주택가 골목길에 자리 잡은 빵집을 찾아갔다. 



 아담한 샵은 깔끔했고 각양각색의 빵이 보기 좋게 진열돼 있었고 무엇보다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주인장 장은철셰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앳되고 훈남이었고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15년 세월을 담담히 들려주었다.


 “넘을 수 없는 산과 씨름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교생 장은철에게 공부는 거대한 산이었다. 대학 대신 직업교육을 받기로 마음먹고 아현산업정보학교 문을 두드렸다. 


공부 열등생에서 빵 우등생으로


 하루 종일 빵 반죽을 주무르며 ‘재미’를 느꼈고 자청해서 이론책을 펴보기 시작했다. 공부 열등생에서 빵 우등생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그를 제과제빵반 담임이 유심히 지켜봤다. 그의 인생 첫 번째 귀인이다.


 “졸업 후 곧장 취업하려는 내게 프랑스 유학을 권유하셨죠.” 대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었던 그는 솔깃했다. 담임은 빵 유학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서너 차례 학교로 불러 끈질기게 설득했다. “고만고만한 실력의 빵 기술자로 살게 하지 말고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란 큰 물에서 제대로 배울 기회를 주자고 하셨죠. 한때 유학을 꿈꿨다 좌절한 선생님의 젊은 시절 회한까지 보태 간곡히 설득하자 부모님의 마음이 돌아섰어요.”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어렵게 떠난 유학이었기에 프랑스 국립제빵제과학교(INBP) 학생이 된 19살 장은철은 독하게 마음먹고 신나게 공부했다. 매일 새벽 4시 기상, 아침 6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에 제일 먼저 도착해 기를 쓰고 기술을 익혔다.


 “내심 한국에서 빵의 기본기를 다지고 왔다고 자부했는데 수업 방식이 딴판이었어요. 자격증 취득 중심의 우리나라와 달리 빵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더군요. 좋은 재료, 최고의 기술로 빵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뼛속까지 스며들도록 가르침을 받았어요.”


 빵 공부에 미친 그를 지도교수가 눈여겨봤고 현장실습 시즌이 되자 조용히 그를 불러 프랑스 명장이 운영하는 베이커리 샵을 소개했다. 그의 인생 두 번째 귀인과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루 18시간씩 빵만 만들다 보니

 알프스 근처 명장의 빵 공방은 늘 전쟁터였다. 첫날부터 새벽 1시에 출근해 하루 18시간 꼬박 빵을 만들었다. 정해진 식사시간도 따로 없고 실습생이 된 이후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명장 셰프의 프라이드가 대단했어요. 만든 빵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일쑤였죠. 작은 실수에도 엄청 혼을 냈지요. 연이은 과로 탓에 어느 날은 코피를 뚝뚝 흘리기 까지 했어요 허나 셰프는 내게 급속 냉동실에 들어가 지혈하고 나와서 일하라고 할 만큼 냉정했습니다.” 혹독한 수련을 견디다 못해 며칠 일하다 도망가는 실습생도 여럿 있었다. 


 “조리복에 내 손으로 단 태극마크를 보고 견뎠어요. ‘난 한국인 대표’라며 스스로를 추켜세웠고 유학경비 어렵게 보내주고 계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참고 또 참았어요.”  


 다혈질 명장도 늘 “예스, 셰프”라며 군소리 없이 일하는 그를 신뢰했고 얼마 뒤 제과파트 책임자로 앉혔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주문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서 온갖 빵과 케이크, 수제 아이스크림까지 몽땅 만들면서 고급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다. 기술 완성도,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한 덕분에 실습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자 그의 실력은 단연 톱이었다.   


 “프랑스에서 4년은 좋은 빵을 만드는 철학과 기술을 다지는 시간이었어요. 귀국하면서 ‘메이드 바이 장은철표 좋은 빵’을 만들고 내 이름 석 자를 대한민국 베이커리 업계에 꼭 남기겠다고 다짐했어요.” 

 귀국 후 월급 70만 원의 빵기술자로 바닥 생활부터 시작해 국내 유수의 베이커리 기업과 메종기욤, 퍼블리크 등 이름난 프랑스 정통 베이커리를 두루 거쳤다.


 “좋은 빵과 돈 되는 빵 사이에서 늘 갈등의 연속이었죠. 버터 대신 원가를 낮추려고 값 싼 마아가린, 첨가제를 쓰면서 정직한 빵을 만든다고 화려하게 마케팅하는 현실이 싫었습니다. 그런 불만이 내 가게를 빨리 오픈하게 만든 동인이 되었습니다.” 



 20 여종의 빵과 디저트를 선보이는 라몽떼는 밤 10시부터 아침까지 꼬박 10시간  밤새워 빵을 만든다. 수십 명 

직원 모두를 ‘빵쟁이’로 만들고 싶은 게 그의 욕심.  ‘빵은 절대 혼자가 아니라 팀으로 만든다’는 프랑스 명장의 가르침을 새기며 직원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기술과 철학을 나눈다.


 30대 젊은 셰프의 꿈은 뭘까? “3대째 가업을 잇는 프랑스의 푸알린은 그날 구운 빵을 비행기에 실어 전 세계에 공수할 만큼 유명한 빵집입니다. 바케트, 통밀빵처럼 흔한 빵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맛을 고수하죠. 라몽떼를 한국의 푸알린처럼 키우고 싶습니다.”  



 달도 차면 기울 듯, 만사는 돌고 도는 게 세상 이치인가 보다. 기를 쓰고 공부해 너나 없이 머리 쓰는 ‘윗대가리’가 되려 피 터지게 싸우다 피로 사회가 될 즈음, 어느새 손을 쓰는 사람들이 ‘장인’ 호칭 들어가며  재조명받고 있다. 아마도 3차원의 세계에선 보이지 않는 순리가 4차원을 통해 작동하는 모양이다. 참 다행이다. 


 얼마 전 오사카 여행 중 쇼핑센터 푸드코트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드넓은 한 개 층 전체가 베이커리 샵들로 가득 찼다. 형형색색 황홀한 빛깔과 디자인으로 침샘을 자극하는 온갖 종류의 빵 세상이었다. 


 싫든 좋든 일본이 우리 보다 앞서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장은철 셰프 같은 ‘손 장인’들의 할 일이 더 많아질 듯 싶다. 탄수화물홀릭인 나는 열심히 눈 밝히며 발품 팔아 솜씨 좋은 빵 장인들을 발굴하는 스스로 정한 본연의 미션에  충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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