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으로 공부하는 고3생
공부 역전.... 매력적인 단어지만 역전의 용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수능시험 한 문제에 대학 레벨이 바뀌는 시대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을 향해 논스톱으로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고3 남학생, 정군을 만났다. 갸름한 얼굴과 큰 키는 훈남형이었지만 부리부리한 눈에는 오기가 엿보였다.
초중고시절 친구들이 기억하는 정군의 ‘인상 퍼즐’은 극과 극을 오간다. 각종 수학경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영재아로 불렸던 초등시절, 학생 금기 사항을 하나씩 해나가며 ‘노는 아이’로 살았던 중등 시절, 실컷 논 후 사춘기 방황의 끄트머리에서 공부를 결심한 뒤 전국 모의고사 성적 상위 1%로 점프할 만큼 지독하게 전력질주 중인 현재의 모습까지 다채롭다.
“늘 최상위권 성적에 영재 소리 들으며 주목받던 아이였는데 초등 6학년 때 갑자기 이사를 했어요. 전학 간 학교가 너무 낯설었지요.” 환경이 바뀌고 사춘기까지 겹치자 ‘모범생’은 엇나가기 시작했다. 노는 무리들과 어울리면서 책을 덮었다.
유년 시절 절친에게 “나 대학 조기 입학해” 문자 받은 뒤
부모님의 한숨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고 세 살 터울의 형이 심하게 나무라자 하룻밤의 가출까지 감행했다.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고 정군은 천안 이모네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늘 내 편이며 마음이 잘 통했던 이모는 나를 푹 쉬게 해주셨어요. 하루 종일 게임만 해도 간섭하지 않고 그냥 두셨죠. 그러면서 ‘너는 영리하고 재주가 많단다. 언젠가 필요할 때 그 재주를 꺼내 쓰면 된단다’라고 격려해 주셨죠.” 두 달쯤 지나자 마음속 ‘독기’가 서서히 빠져나갔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교생이 된 뒤에도 정군은 여전히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관성적으로 집과 학교를 오갔다. “고교 입학 첫날, 한교 근처 다리 밑으로 가니까 노는 아이 20여 명이 모여있더라고요. 출신 학교도 사는 곳도 제각각인데.... 끼리끼리 뭉친다고.... 다들 용케 서로를 알아봤지요.” 그렇게 떼 지어 학교로 등교했고 선생님, 다른 아이들에게 ‘노는 아이들’로 자청해서 찍혔다.
“고1이 끝나갈 무렵 초등시절 절친과 오랜만에 문자를 주고받았어요. ‘아직도 노니? 난 내년에 졸업한다’는 문자를 보니 가슴이 쿵 내려앉더군요. 어린 시절 전교 1,2등을 다투던 사이였는데 그 친구는 과고에 진학한 뒤 조기졸업을 하게 됐고 나는 ‘노는 아이’란 딱지가 붙어 있더군요.” 정군의 고민이 시작됐다.
마음 한 켠에는 “이제 책 다시 잡으면 만회할 수 있을 거야”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숨어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고1이 되고 보니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나도 대학 가야겠다’ 뒤늦은 결심
내팽개쳐 놓았던 성적표를 보니 전 과목 3~5등급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수학에서 희망의 싹이 보였다. 어려서부터 좋아했고 공부를 놓았던 중학교 시절에도 90점대를 유지하던 과목이라 내심 자신이 있었다.
“이제부터 공부할래요.” 부모님께 선언한 뒤 우선 수학부터 붙들고 늘어졌다. “문제를 풀면 대충 감으로 맞추기는 하겠는데 개념의 기초가 없다 보니 한계에 부딪히더군요.” 수학 교과서 속 공식들을 직접 증명해 나가며 공식들 간의 복잡 미묘한 상관관계를 터득해 나갔다.
학교에서는 운 좋게 에서 ‘귀인’을 만났다. “과학 선생님께서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덕분에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친구와 점수 내기까지 해가면서 과학을 파고들었지요.” 점점 수학, 과학 점수가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고1 때까지만 해도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란 막연한 생각으로 목표 없이 살던 그였지만 고2를 마칠 무렵 ‘꼭 대학에 가야겠다’란 분명한 좌표가 생겼다.
“과학 선생님께 진로 상담을 받았어요. 수학, 과학만은 1등급인 내 성적표를 보며 아직 늦지 않았고 가능성이 있다며 다른 과목들을 차근차근 공략해 스카이대를 목표로 공부하라 용기를 주셨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 고3 직전에 정군에게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다른 과목들도 전략을 세워 하나씩 공부해 나갔다. 국어는 문법부터 총정리하고 문학작품 축약본을 매일 읽었다. 국어 지문도 정해 놓은 분량을 꼬박꼬박 풀었다. 처음에 50점대를 밑돌던 국어 성적이 수직 상승했다.
점점 다른 과목에도 자신감이 붙자 공부에 가속도가 붙었고 내신 성적이 전교 15등 이내로 올랐다. 고3 모의고사 성적은 전국 상위 1% 안에 들만큼 수직 상승했다. “주위 시선이 180도 바뀌더군요. 수학 문제가 막힌다며 책 들고 찾아오는 친구들까지 생기더군요(웃음).”
모의고사 성적 1% 안에 드는 성적표를 찍어 친구에게 보내자 그 사진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정군의 성적표 사진 카톡 대문 사진으로 바꾸고 공부 채찍질하는 친구까지 생겨났다.
배짱으로 버티고 멘토가 밀어주고
공부는 머리보다 노력, 자신을 믿는 배짱이 중요하다고 정군은 강조한다. “고3 첫 모의고사 점수가 곧 수능 성적이라는 말을 선생님들에게 많이 들었죠. 하나 난 믿지 않았어요. 노력하니까 단기간에도 이만큼 성적이 올랐는데 앞으로 수능까지 9개월이나 남았는데...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가 특히 강조하는 건 주변의 멘토다. “지독히 방황하던 시절 ‘너만의 길을 찾을 거라며 조급해하지 말라’고 따스하게 품어줬던 이모, 비뚤어지려는 내게 브레이크를 걸어줬던 형, 목표를 크게 가지라고 격려를 해줬던 과학 선생님과 고3 담임선생님이 내게는 모두 은인이죠. 힘들 때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기댈 수 있는 ‘내 편’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다사다난한 10대의 경험을 통해 훌쩍 자란 정군의 한마디였다.
사실 정군의 성적이 드라마틱하게 상승곡선을 탈 수 있었던 건 IQ 145가 넘는 타고난 머리가 뒷받침 됐기 때문이다. 허나 오기로 똘똘 뭉쳐 힘입게 공부 시동을 걸 수 있는 더 큰 원동력은 ‘나는 한다’는 자존감의 힘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