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현타'라는 말은 침대보다 회사에서 더 자주 쓰이나
현자 타임. 줄여서 현타. 절정 후의 허무, 우울, 공허함을 이르는 말. 온몸을 휘감던 열정이 사그라지고 난 뒤 불현듯 찾아오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인식. 그런데 우리는 왜 이 '현타'라는 말을 침대 보다 회사에서 더 자주 쓰는 걸까.
회사에서 현타 오는 순간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일이 바빠서 밥도 못 챙겨 먹을 때. 야근하느라 가족의 연락이 피곤하게만 느껴질 때. 월급이 쥐꼬리일 때. 상사가 멍청한 소리를 할 때. 역류성 식도염과 디스크와 공황장애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면서 겨우겨우 어떤 일을 해냈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료조차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모를 때. 의미 있다고 믿어왔던 일이 사실은 세상을 망치고 있는 일이라는 자각이 찾아올 때. 처음 일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를 잃어버리게 됐을 때.
요컨대, 현타는 삶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일을 위해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온다. 돈을 벌든 자아를 실현하든 가족을 부양하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든 나름의 욕망을 위하며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세상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을 뿐인 80억 개체 중 한 마리일 뿐임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순식간에 우리의 정신을 안드로메다까지 날려 보낸다. 그 먼 곳에서 바라본 나는 우주 먼지다. 비대한 자아와 먹여 살려야 하는 몸을 가진 죄로 존재의 위기를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는, 날마다 믿었던 의미에 배신당하면서도 꾸역꾸역 아침이 되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근해야만 하는 작고 귀여운 우주먼지……
만약 지구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동시에 현자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그날은 문명(그래봤자 우주 먼지 덩어리일 뿐이지만)이 끝나는 날일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우주먼지들의 시스템은 모두가 동시에 현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첫 번째 안전장치는 ‘성장’이다. 노력을 기울이면 반드시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된다는 믿음. 그러므로 계속해서 부산을 떨어야 한다는 사고방식. 이는 다분히 수학적인 세계관이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고, 결괏값을 x축과 y 축 사이에 찍어보면 우상향 하는 그래프가 이어질 것이라는 달콤한 약속. 우리는 이 사고방식을 생물학적 성장기 내내 학습한다.(실제로 몸이 자라고 있으므로 성장이란 사고방식 또한 진실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성장을 철석같이 믿기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과장된 자기소개서를 써대고, 면접을 보는 동안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헬스클럽에서 쇠를 들거나, 인공지능과 외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모두 성장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한 '리추얼'이다. 하지만 세상은 수학이 아니다. 사회에 발을 들이는 그 시기부터 성장은 본격적으로 배신을 하기 시작한다. 두 배 열심히 일하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연봉이 아니라 구내염의 개수다. 성장의 배신을 경험하지 못한 행운아들은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 힘을 쏟아붓고도 쓰디쓴 실패를 맛보게 된다.
또 다른 안전장치는 ‘우정’이다. 성장과 현타는 모두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점점 중요하고 대단한 무언가가 되어가는 감각은 성장, 보잘것없는 우주 먼지임을 깨닫는 순간은 현타. 스스로에 대해 골몰하는 한 성장과 현타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일한 출구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타인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회사에서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껴지더라도 같이 회사 욕을 할 동료가 있다면, 그 동료는 계속 그 회사를 다닐 이유가 되어줄 수 있다. 아무리 애써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점심시간에 동료와 회사 욕을 하는 것을 일상을 떠받치는 레저활동으로 삼으면 큰 죄가 될까? 어느 연구소의 미친 프로그래머들이 전 세계 인구의 97%를 실업자로 만들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 우리에겐 우정을 즐길 시간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모든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현타가 찾아오는 걸 막을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아껴뒀던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한다. 그 카드의 이름은 연차다. 언젠가 도저히 현타를 참을 수 없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차를 쓴 적 있다. 업무용 메신저를 끄고, 얼마 안 되는 여가시간을 쪼개고 쪼개 캘린더에 넣어뒀던 공부 시간을 지우고, 침대에 누워 짐승처럼 하루를 보냈다. 옷도 입지 않고 양치도 하지 않고 밥도 이불을 덮은 채 먹었다. 다음 날 회사로 돌아갔을 때, 나는 분명 반쯤은 현자였고 반쯤은 짐승이었건만 사무실에 반인반수가 출몰했다고 신고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번에 연차를 쓴다면 이런 생각을 좀 해보고 싶다. 현타를 겪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은 가능할까. 이 질문은 두 개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인간은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을까. 욕망이 거세된 우울한 현자로 살 것인가, 부조리에 고통받으며 현자와 짐승을 오가는 반인반수로 살 것인가. 행복은 어느 쪽에 놓여 있을까.(2023.02)
source : https://fullchill.stibee.com/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