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의 가장 좋은 햇살을 자랑하는 일
지난 주말에 친구가 책방을 오픈했다. 나는 거기서 일을 도왔다. 끼리끼리라고 얼굴을 비추러 온 친구의 친구들도 자영업자였다. 손님을 기다리며 우리는 둘러 앉아 커피를 마셨다. 벽의 두 면이 통유리인 친구의 책방은 햇살 맛집이었다. 우리는 책방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칭찬했다. 다들 자기 가게가 있다보니 자연스레 대화는 햇살 자랑 콘테스트가 됐다.
참가번호 1번 카페 사장님은 자기 가게엔 오전 10시 쯤 볕이 잘 드는데 안쪽 벽이 나무재질이어서 꼭 평화로운 숲 속의 거대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자랑했다. 참가번호 2번 술집 사장님은 창이 서향이라 낮 동안엔 볕이 잘 안들지만 어차피 그 시간엔 영업을 안 하니 괜찮다고, 그래도 오픈 준비할 때 보이는 노을이 참 좋다며 웃는다. 주방에서만 보이고 어차피 그쯤엔 들어오는 손님도 없지만 그래서 저 노을이 오직 자기만을 위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한다. 햇살자랑을 하는 참가자들의 얼굴은 참 좋아보였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한마디 씩 하다보니 자연스레 내 차례가 돌아왔다. 친구가 묻는다. "너네 거긴 어때?" 친구의 친구인 사장님들이 묻는다. "상우씨도 가게 하세요?"
가게는 아니지만, 나도 내 공간을 갖고 있긴 했다. 누군가는 사무실(자식이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 부모님 시점)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작업실(프리랜서 친구들 시점)이라고 부르고, 또 누군가는 아지트(술꾼 시점)라고 부르는 월세 10만원짜리 노옵션 옥탑방이다. 나는 거기다 동네 형이 준 컴퓨터, 거실에서 자리만 차지하던 산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소파, 누군가 버린 책상,책꽂이,라꾸라꾸와 당근마켓에서 산 커피포트를 가져다 두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쯤 자랑할만한 햇살이 비추는지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주절댔다. ”어...그냥 작업실?같은게 있긴 한데 햇살은 잘 모르겠네요? 신경쓰질 않아서?“ 내 말을 들은 사장들은 어떻게 그걸 신경쓰지 않을 수 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게는 그 갸우뚱이 자기 일에 확신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가장 좋은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을 모를리가 없다는 비난처럼 느껴졌다.
억울했다. 나는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잘 모르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작업실에서 어떤 이미지를 쫓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작은 축제를 열고, 그 축제가 그들의 밥벌이가 되는 유토피아적 이미지였다. 나는 이 이야기가 떠오른 그 길로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 이미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나의 율도국에 가담할 사람을 돈이나 서비스가 아닌 이야기로 모으겠다는 이미지만큼이나 허황되게 들리는 계획을 하나 만들어냈다. 마치 불사조 기사단을 만들기 위해 해리포터를 쓰겠다는 것처럼 경제성이 지극히 떨어져 보이는 계획이긴 했지만 나는 이것이 아주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이전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에 도전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 또한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근사함과 자부심을 아무리 되새겨봐도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내 자리에 들어오는 가장 좋은 햇살을 모른다. 햇살을 자랑하는 사장님들의 얼굴은 분명 좋아보였는데, 어쩌면 나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왜 나는 내 자리에 들어오는 가장 좋은 햇살을 모를까?
작업실 구석의 소파에 앉아, 노옵션 원룸의 한가운데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책상을 바라봤다. 책상은 때마침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서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실 나는 내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만큼 내 삶이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남들이 커리어를 시작할 나이에 배달과 청소와 단기 알바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게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를 자주 고민했고, 작업실로 출근할 땐 돈 없는 백수가 무슨 작업실이냐는 시선을 두려워했으며, 집에 돌아갈 땐 외롭고 낙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통장 잔고를 볼 때면 언제나 인생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나는 이 모든 짓거리가 사실은 근사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걸 결국엔 깨닫게 되는 것이 두려워 '실험'이라는 실패의 가능성을 포함한 단어로 내 프로젝트를 수식했다. 요컨대 나는 내 일을 만들어내고, 그걸 사랑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결과로 얻은 삶까지 사랑하는데는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의 밝은 면과 그림자의 사이에서만 헤매느라 그 일을 비추는 햇살은 볼 생각도 하지 않은 꼴이었다.
간신히 그림자에서 눈을 때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작업실에 들어오는 햇살이 보인다. 처음으로 보는 햇살이었다. 지난 주말에 제일 좋은 햇살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잘 모른다는 내 말이 다른 이들에겐 행복하지 않다는 SOS로 들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갸우뚱했던 표정의 의미도 멸시가 아니라 괜찮냐고 물어보는 그런 걱정의 의미였으리라. 어쩌면 누군가는 내게 햇살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해보라는 충고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도 분명 나름의 그림자를 갖고 있었을 텐데. 책을 팔아서 먹고 사는 건 늘 힘든 일이었고, 정이 들라손 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 동네카페인데다가, 요즘 술집은 10시면 문을 닫아야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림자에 대해 말하는 대신 햇살을 자랑했다.
햇살을 자랑하던 그 좋은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도 이제 한걸음 물러나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에도 주의를 기울여보겠노란 생각을 했다. 내 서사를 과장하며 불안을 감추려 애쓰는 대신 그냥 내 삶을 사랑해보기로 했다. 하루하루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점에만 집중하는 방법으로. 이런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건 아님을 물론 알고 있지만, 일이 놓인 책상보다 내 삶을 놓은 공간을, 그 공간을 채우는 햇살을 바라보기로 했다.
자기 자리의 가장 좋은 햇살을 자랑한다는 건 결국 자기의 일을, 그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이런 자랑은 증명서 하단의 자필 서명과 같은 것이다. 사랑을 행복으로 완성시키는 공증의 서명.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오후 4시다. 서향으로 난 반원형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작업실 안을 따뜻한 주황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지금의 이 햇살이 가장 좋은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햇살 자랑 콘테스트에 끼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분명히 할 말을 마련해두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