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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3. 2015

그대는 아는가요
내겐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살인의 추억, 2003

2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화성에서 일어난 끔찍한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실화에 뿌리를 둔 <살인의 추억>에서 희생자의 수가 다 채워질 때까지 살인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도, 범인을 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단서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형사들의 뒤를 바쁘게 좇지만, 결국엔 영구 미제로 남아있는 찝찝한 결말과 착잡한 후일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릴러 영화로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미리 주어졌음에도 <살인의 추억>은 마지막 순간까지 서늘한 긴장과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오히려 검거되지 못한 범인의 묘연한 행방으로 인해 사회적인 공포로 확장된 불안감은 한 편의 스릴러로 끝나지 않고, 영화 바깥으로 뛰쳐나와 지금 우리가 숨 쉬는 현실 위에 흉흉했던 그때의 기억을 불러낸다. 미증유의 사건 앞에 선병질적으로 반응했던, 잇따른 살인에 그저 속수무책이었던, 그리고 극악무도한 범죄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무능하고 무지했던 80년대 우리의 자화상을. 


미국의 저명한 문화평론가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은 저서 『지정학적 미학 The Geopolitical Aesthetic』에서 그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사회를 이루는 전체성은 피부처럼 외부에서 감지할 수 있지만 정작 그것을 덮어 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우리 자신이 그 비대한 사회를 이루고 움직이게 하는 수족이자 내장기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 저지른 범죄의 단서를 좇아 규명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지식으로 일깨워지기 이전에 희미하고 모호했던 근대의 삶처럼, 우리 자신이 언젠가 읽히리라는 것을 모르는 책 속의 깨알 같은 문자와도 같다는 것이다."


근대와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고서야 비로소 그 사회에서 일어난 일상의 사건으로부터 근대성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던 제임슨의 말처럼 <살인의 추억>에서 봉준호 감독은 20년이라는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우리의 '햇살 가득한 그날'을 되돌아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枯嶺街少年殺人事件)>을 통해 양덕창(楊德昌) 감독이 대만의 지난 날을 돌아보았던 것처럼. 


허나 봉준호 감독은 좀 더 영악한 편이었다. 양덕창 감독이 고집스러우리만치 느린 호흡으로 탕약을 달이듯 대만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근대와 정교하게 연결 지었다면, 그는 빠르고 감각적인 스릴러의 호흡으로 한국 최초의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쓰디쓴 기억을 달콤하게 코팅된 당의정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때를 모르는 세대에게는 흥미로운 스릴러로 읽히지만, 그때를 아는 세대에게는 왠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대의 그늘이 혼돈스러운 매직아이 위로 슬그머니 떠오르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서울음반(2003)


이런 감독의 의도는 영화음악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미국의 로큰롤을 중심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시대와 상황을 은유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살인의 추억>은 일본 작곡가인 이와시로 타로(岩代太郞)의 영화음악에 대부분 의지한다. 사건의 스피디한 전개와 현장의 긴장감을 돋보이게 하는 가상의 음악을 통해 표면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스릴러의 향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감독 자신이 시간 상으로 그때와 떨어져 있다면, 외국 작곡가인 이와시로 타로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떨어져 그때 그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철저히 외부인으로서 뼛속 깊이 그 시대를 이해한다거나 불행한 사건에 쉬이 감정을 이입할 순 없겠지만, 대신 이와시로는 좀 더 객관적이고 (영화적으로) 사실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시대와 살인에 대한 기억일 것. 그리고 사실적인 음악일 것. 이 두 가지를 작곡가에게 요구했던 봉준호 감독의 주문은 80년대에 일어난 연쇄 살인이라는 사실과 그 이면의 진실을 음악으로 교란하려는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신시사이저와 뉴에이지 그리고 전자음악이 지배했던 80년대의 사운드답게 <살인의 추억>에 선보이는 이와시로 타로의 스코어는 인공적이고 건조하며 몽롱하다. 영화의 앞과 뒤에서 수미쌍관을 이루는 황금빛 논과 파란색 하늘의 진한 대비를 제외하고, 채도가 떨어지는 창백한 화면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는 차가운 음색은 이 '한국형 스릴러'가 지닌 토속적인 색깔보다 오히려 스릴러라는 장르 특유의 색채에 더 공을 들인 것 같다.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기보다 그들이 짓는 표정과 제스처에, 그리고 사건의 주 무대인 한적한 시골길의 불안과 칠흑 같은 밤의 공포를 청각적으로 표현한 선율은 현장을 검증하는 사진처럼 단편적이지만 무척 생생하다. 많은 것을 생각할 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상황에 더 즉물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부추기듯이. 그래서 그의 스코어는 스릴러 영화음악으로서 본연의 임무에,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주문에 충실하다는 인상이 짙다. 


그건 영화의 절정부로 치닫는 '피로'나 '암흑 속의 소녀'로부터 시작되는 애닮은 멜로디뿐만 아니라 사운드트랙 후반부에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담긴 일련의 스코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우울한 선율에 담긴 정서는 마지막 희생자에게 동화된 깊은 슬픔이라기보다 차라리 한 발짝 떨어져 비극을 바라보는 이의 참담함이나 패배감 또는 분노 같은 제 삼자의 감정에 더 가깝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음악의 태도는 삽입곡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에서 무척 도드라지게 들리는 세 곡의 가요는 봉준호 감독의 음악적 기지를 엿보게 한다. 스코어와 달리 삽입곡은 노래 속에 가사라는 분명한 의미가 담겨있기에 영화 속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릴 때 가공할 효과를 발휘한다. <살인의 추억>은 단순히 멜로디나 곡의 분위기에 연연해 의미 없는 삽입곡을 나열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 그리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화의 간접적인 메시지까지 담아내는 한국 영화음악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경지를 보여준다. 


비가 내리자 한 여인이 황급히 빨래를 걷는 장면에서부터 등장하는 장현의 '빗속의 여인'은 늘 비와 함께 찾아오는 살인의 공포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비와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잠정적인 희생자일 수도 있는 여고생들은 대통령이 지나가는 길목에 환영 인파로 동원되고, 시위하던 여직공은 형사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어딘가로 끌려간다. 개인의 안전보다 정부의 권위가 더 우선했던 사회와 대낮에도 공권력의 야만적인 폭행이 묵인되던 시대의 잊을 수 없는 빗속의 여인들일 것이다. 또한 박두만의 입을 통해 영화에 흐르던 윤승희의 '제비처럼'은 발랄한 디스코 풍의 멜로디와는 정반대로 그 노랫말엔 돌아오지 않는 연인에 대한 쓸쓸한 넋두리가 담겨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으려 하지만 그들의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날쌘 제비 같은 범인에 대한 절묘한 은유이자 서글픈 자기 연민인 셈이다.

 

'제비처럼'이 형사가 범인을 향해 부르는 노래라면,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는 범인이 형사에게 보내는 노래처럼 들린다. 세 곡의 삽입곡 중에서 영화적인 상상력이 가장 돋보이는 이 곡은 살인이 일어나던 날마다 라디오의 전파를 타면서 형사들로 하여금 범인에 대해 구체적인 심증과 물증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이 노래의 후반부는 공교롭게도 영화 속에서 매번 들리지 않는다. 왜 일까.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그대는 아는가요. 

내겐 아무 관계없다는 것을.


그것은 빗나간 추측과 심증으로 무고하게 취조당한 용의자들이 후유증으로 목숨까지 잃었던 80년대의 또 다른 살인에 대한 추억일 수도 있고,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그리고 위조해서라도 만들고 싶었던 범인으로 지목된 박현규가 실은 사건과 아무 관계없음을 고백하는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의 '진정한' 스포일러가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을 터다. 


후진국도, 그렇다고 선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으로서 80년대의 대한민국은 <살인의 추억>에서 그렇게 근대의 그늘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는 살인의 아픈 추억처럼, 우리는 제임슨의 말했던 보이지 않는 근대의 피부를 여전히 뒤집어쓴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화성에서 일어난 끔찍한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




01 [01:11] 햇살 가득한 그날

02 [00:31] 메인타이틀

03 [02:21] 얼굴들

04 [00:46]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05 [01:20] 어둠속으로

06 [00:36] 건널목

07 [01:12] 갈대밭

08 [02:49] 제비처럼_ 윤승희

09 [02:07] 기다리던 비

10 [02:21] 빗속의 여인_ 장현

11 [00:55] 공장의 불빛

12 [01:10] 비명

13 [00:48] 제자리걸음

14 [01:44] 달밤의 질주

15 [01:42] 무당눈깔

16 [00:34] 언덕 너머로

17 [00:10] 짧은 만남

18 [01:15] 고백

19 [00:33] 고백 이후

20 [00:34] 밤길

21 [01:54] 예고된 죽음

22 [00:40] 하얀 얼굴

23 [01:00] 피로

24 [01:29] 암흑속의 소녀

25 [01:24] 니가 죽였다고 말해 

26 [01:20] 멀리서 온 편지 

27 [01:57] 패배

28 [00:50] 햇살 가득한 오늘

29 [03:12] 살인의 추억

30 [03:44] 비의 추억

31 [05:35] 밤의 추억

32 [04:57] 우울한 편지_ 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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