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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8. 2015

끝을 시작하는
니노 로타의 즐거운 행진곡

8과 1/2, 1963

<(펠리니의) 청춘군상 Luci Del Varieta>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탓에 페데리코 펠리니 Federico Fellini의 단독 연출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알베르토 라투아다와 공동으로 제작한 그 영화는 13년 뒤 반쪽짜리 영화로 카운트된다. 그의 열 번째 영화인 <8과 1/2>를 통해서다. 펠리니 감독이 연출한 6편의 장편과 두 편의 옴니버스 영화에 들어간 단편을 합해 1편으로 계산하고, 라투아다와 만든 문제의(!) 공동 연출작을 반으로 처리해 그때까지 7과 1/2편이었던 필모그래피에, 신작이 될 이 영화를 더해 만든 재미있는 타이틀은 내용만큼 위트가 넘친다. 


촬영 개시를 불과 2주 남겨놓고도 자신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비전도 없는 감독 귀도. 답답하고 괴로운 꿈으로 현현하는 강박은 그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고, 그 때문인지 간에 병까지 얻은 감독은 요양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러나 제작 준비를 위해 요양소까지 따라온 작가와 프로듀서, 배우와 스태프들이 그를 가만히 놔둘 리 없다. 게다가 귀도가 몰래 만나는 유부녀 카를라와 아내 루이자까지 찾아와 가뜩이나 곤란에 처한 사내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든다. 딱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귀도의 영화는 프로듀서에게 등을 떠밀려 성대한 제작발표회까지 계획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달리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감독 귀도는 과연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까.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긴 했지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고뇌를 그린 영화만으로 <8과 1/2>을 설명하기엔 어딘가 2프로 부족하다. 흑백의 화면에 수시로 끼어드는(혹은 현실과 평행선을 그리는) 귀도의 꿈과 환상과 회상이 현실의 논리적인 흐름을 자꾸 방해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부터 그의 과거 영화에 출연했을 여배우까지 귀도의 삶과 관계된 여성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꿈과 환상과 회상은 감독의 트라우마이자 콤플렉스이며 예술적인 영감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연인 귀도의 마음에 불쑥 떠오르는 이 상념들은 감독인 그가 지금 만들고 있다는 알 수 없는 영화의 밑그림과도 같다. 그러니까 <8과 1/2>은 창작의 괴로움을 겪는 어느 영화감독의 고백이면서, 바람기 다분한 한 남자의 인생에 대한 넋두리이기도 한 셈이다. 또한 만들다 '엎어진' 영화에 대한 사연이 곧 한 편의 코미디로 완성되는 기묘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한층 입체적으로 꾸며주는 것은 니노 로타 Nino Rota의 음악. 페데리코 펠리니의 공동 연출작인 <청춘군상>의 음악을 알베르토 라투아다의 아버지가 작곡하면서 데뷔작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그 이후 펠리니 감독과 늘  함께했던 로타는 <8과 1/2>로 여덟 번째 호흡을 맞췄다. 세르지오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꼬네 콤비 이전에 이미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영화음악을 만들고, 촬영장에 틀어놓은 그 음악에 맞춰 촬영을 진행하곤 했던 펠리니는 이 영화만큼은 촬영이 모두 끝난 상태에서 음악을 맡겼다. <8과 1/2>을 촬영할 무렵 치네치타(Cinecitta)의 현상소는 한창 파업 중이었고, 펠리니는 그날그날의 촬영분을 볼 수 없었기에 결국 편집에 들어가서야 그동안 찍은 필름을 확인해 음악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8과 1/2>에서 페데리코 펠리니가 구사하는 유려한 카메라 워크와 어우러지는 음악의 자연스러운 호흡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멋지다. 각양각색 인물들의 모습과 표정을 좇아가면서 사소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리듬은 교통 체증에 시달리는 귀도의 악몽에 이어 그가 머무르는 요양소 풍경을 스케치하는 또 하나의 근사한 장면으로 눈은 물론 귀까지 사로잡는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발퀴레의 비행'과 조아키노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그리고 표트르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줄줄이 엮어낸 이 장면을 보다 보면 니노 로타에게 스코어를 맡기기 전 펠리니가 품었던 이 영화음악의 이미지를 슬쩍 상상해볼 수 있다. 


<8과 1/2>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King Records(2007)


작곡 능력은 없지만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 뚜렷한 비전을 가졌던 펠리니는 니노 로타에게 마음에 담아놓은 음악의 느낌을 세세하게 설명하려 애썼고, 로타는 피아노 앞에 앉아 그가 말하는 이미지를 즉석에서 멜로디로 연주해 감독과 영화음악의 콘셉트를 함께 찾았다. 그리고 더러는 템프 트랙(Temp track: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전 감독이 원하는 음악의 느낌과 가장 비슷한 곡을 미리 선곡해 놓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골라놓은 곡을 그대로 영화음악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이 앨범에 5번째 트랙으로 실린 'Concertino alle Terme(요양소의 합주곡)'이 바로 그것. 삽입곡이라면 원곡의 제목과 작곡가를 그대로 표기하는 요즘과 달리 60년대에 발매된 사운드트랙 앨범부터 이런 제목으로 수록된 로시니와 차이코프스키의 클래식 넘버는 펠리니 영화의 음악으로서 새 생명을 얻는다. 그 발랄하고 활기찬 선율과 반대로 노쇠한 병자들로 가득 찬 요양소 풍경이라니. 영화음악의 정공법을 비트는 기발한 선곡이다. 


'Rivolta Nell'Harem(하렘의 반란)'으로 명명한 바그너의 곡도 마찬가지. 귀도의 여성 편력을 뮤지컬 퍼포먼스 같은 코믹한 환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성난 여자들에게 쫓기던 사내는 돌연 맹수를 길들이는 서커스단의 조련사처럼 채찍을 휘둘러 폭동을 잠 재운다. 궁지에 몰린 남자의 처세술이랄까, 영화감독으로서의 카리스마랄까. 바그너의 광포한 선율 속에서 펼쳐지는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자못 흥미롭다.


그러나 그 어떤 곡보다 펠리니의 이 시끌벅적한 영화와 나란히 보폭을 맞추는 선율은 니노 로타의 테마곡들이다. 잔뜩 달아오른 서커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악단이 연주하는 행진곡 같은 'La Passerella Di Otto E Mezzo(8과 1/2의 잔교)>는 비단 이 영화를 위한 테마곡일 뿐만 아니라 펠리니의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후 그가 연출한 전 작품에 걸쳐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행진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주인공 귀도의 입을 빌려 '인생은 축제'라고 말하는 펠리니의 인생관이 브라스 밴드의 금빛 선율과 흥에 겨워 비틀거리는 리듬에 오롯이 투영되어 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영화감독의 임무인 것처럼 저마다의 인생을 꾸려가는 것은 자신의 몫. 허나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내기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쌓여있듯, 우리네 인생도 그저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귀도가 연출하는 영화의 정체를 끝내 알 수 없는 이유도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일 터다. 인생에서 느끼는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혼돈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귀도의 애환과 포개질 때 니노 로타는 점잔을 빼거나 너스레를 떠는 멜로디로 장단을 맞춘다. 그리고 그 모든 선율에는 서커스 음악의 분위기가 슬며시 드리워져 있다. 혹시라도 본심을 들킬세라 전전긍긍하는 귀도의 속내를 트롬본과 전자 기타의 유쾌한 선율로 묘사하는 'L'Illusionista(마술사)'에도, 다섯 개의 옷가방을 들고 요양소에 불쑥 나타난 철없는 정부를 위한 'Carlotta's Galop(카를로타의 갤럽)'에도, 그리고 귀도가 사랑했던 여자들이 한데 모여사는 환상의 나라 'L'Harem(하렘)'에도. 


왈츠와 룸바 그리고 미끈한 스윙 리듬에 실린 한바탕 소동극이 휩쓸고 지나간 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다시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정답게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또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즐거운 원무(圓舞). 자신을 미워했던 사람에게도,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주며 니노 로타의 마지막 행진곡에 그들이 몸을 맡길 때 영화는 비로소 인생이 되고, 인생은 그렇게 축제가 된다.




01 [02:23] La Passerella Di <Otto e Mezzo>

02 [05:31] Cimitero

                   Gigolette

                   Cadillac-Carlotta's Galop

03 [02:02] E Poi(Walzer)

04 [02:18] L'Illusionista

05 [01:56] Concerto alle Terme

06 [02:58] Nell'Ufficio Produzione di <Otto e Mezzo>

07 [03:46] Ricordo d'Infanzia-Discesa al Fanghi

08 [03:13] Guido e Luisa-Nostalgico Swing

09 [02:31] Carlotta's Galop

10 [04:30] L'Harem

11 [05:19] Rivolta Nell'Harem

                   La Ballerina Pensionata - (Ca C'est Paris)

                   La Conferenza Stampa del Regista

12 [05:14] La Passerella di Ad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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