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L Sep 30. 2015

그것이 인생

인생, 1994

영화의 제목은 <인생(活着)>, 즉 삶을 이야기하지만 주인공 푸구이의 주변엔 온통 죽음뿐이다. 때로는 운명이라는 이름과 겹치면서. 그리고 또 때로는 내전이나 혁명이란 단어와 포개지면서. 아슬아슬 숨이 넘어갈  듯하면서도 어느새 카랑카랑한 음색으로 되살아나는 얼후의 질긴 멜로디처럼 푸구이를 끌고 가는 기구한 삶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계속 굴러간다. 생에서 마주치는 잔인한 새옹지마와 어이없는 전화위복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한편으로는 작은 위안을 삼으면서. 


수수께끼 투성이인 인생의 한 복판을 걸어가며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덧없는 의혹을 품기보다 '그것이 삶'이라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주인공들의 표정엔 격랑의 세월을 살아남은 중국인의 애환과 시름이 깊은 주름살로 패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와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사는 사람들의 <인생>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길흉과 화복에 함께 눈물 흘리고 웃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한낱 연민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모종의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장이모우(張藝謀)라는 이름에서 화사한 색감과 화려한 액션으로 보는 이의 넋을 빼놓던 <영웅(英雄)>이나 당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슴 아픈 로맨스 <연인(十面埋伏)>의 스타일리시한 장면들을 먼저 떠올린다면, 9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영화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첸 카이거(陳凱歌)와 함께 대표적인 중국 5세대 감독으로서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장이모우의 초기작들은 그만의 영민한 비전과 소소한 이야기로 그때까지 굳게 닫혀 있던 중국 소시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새로운 물꼬를 터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정치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는 위화(余華)의 금지된 소설을 영화로 옮기면서 부질없는 인간사와 가망없는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중국의 근현대사를 다시금 그윽한 눈길로 바라본다. 몰락한 시대의 구습이 아직 남아있었던 중화민국 시절부터 치열하고 살벌했던 국공내전, 궁핍한 인민의 삶을 담보로 부강한 미래를 약속했던 대약진 운동,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과거와 전통을 모두 부정했던 문화혁명에 이르는 아픈 세월을. 역사라는 거대한 운명에 휩쓸린 소설 속 푸구이 가족의 일생은 그야말로 참담하고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영화 <인생>에는 푸구이의 삶과 나란히 놓여 생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또 하나의 숨은 주인공이 있다. 바로 그림자극이다.  


<인생>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Milan Records(1994)


경극이나 홍등과 같은 중국 고유의 문화를 영화 속 삶과 결부시키려는 5세대 감독으로서의 열망이자 소설보다 덜 자극적으로 고달픈 현실을 은유하려는 하나의 장치로 마련된 이 그림자극 도구는 운명의 손에 매달린 푸구이의 인생처럼, 인간의 손끝에서 자신의 명운을 얻는다. 한량의 가벼운 소일거리에서 밥벌이의 도구로,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현장의 여흥으로, 무자비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자 새로운 삶과 희망을 품는 마지막 안식처로.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장이모우와 함께 그의 초기작들을 차례로 완성했던 영화음악가 조계평(趙季平)에게 중국 전통음악을 활용한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주었다. 


푸구이가 연기하는 그림자극의 배경음악이면서 동시에 푸구이의 생애를 관통하는 삶의 배경음악이기도 한 그의 스코어는 인생의 희비가 교차하는 매 순간마다 찾아와 푸구이와 아내 자젠의 얼굴에 생의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마치 장막 뒤에 말없이 흔들리는 종이 인형들이 연주자의 풍악과 노래를 만나 비로소 생명력과 감정을 얻는 것처럼. 때로는 익살스럽게 그리고 때로는 구슬프게 심금을 울리는 얼후 가락이 해학과 처절함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소설 속 위화의 필치를 닮았다.


조계평은 <인생>을 위해 세세한 장면들을 묘사하는 스코어가 아니라 하나의 굵직한 덩어리를 이루는 영화음악을 작곡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덩어리로 뭉쳐진 스코어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반복해서 사용된다. 가끔씩 변주된 테마들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만 얼후와 신시사이저를 기본 바탕으로 만들어진 메인 테마 'Lifetimes'의 멜로디는 자꾸만 되풀이해서 찾아오는 지긋지긋한 운명의 그림자처럼 거의 모든 트랙에 자신의 흔적을 드리운다. 신시사이저의 굵고 냉정한 음색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무게감 같은 것이라면, 아마도 그와 대조를 이루는 얼후는 가장 중국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소리가 아닐까.


이것은 중국 본토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들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시절을 보냈던 대만이  지난날을 회고하는 일련의 영화에 자주 등장시켰던 뉴에이지 풍의 사운드와 조계평의 스코어가 서로 비슷하게 들리면서도 한편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차 없는 역사와 운명의 물결 속에서 길을 잃은 대만이 몽롱한 신시사이저 음색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과거와 결별하고 또 치유하고자 했다면, 중국 5세대 감독들은 문화혁명으로 스스로 내팽개친 자신의 문화를 애써 기억해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태도를 두고 누구의 방식이 옳은지 섣불리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다는 것에 어떤 정답도, 매뉴얼도 없는 것처럼 모두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는다는 것 그리고 추억한다는 것이 삶의 일부라면,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내일을 기약하고 소박한 밥상 앞에 둘러앉아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는 것. 아마도 그것이 인생이고, 또 영화 <인생>이 건네고픈 이야기일 것이다.




01 [03:21] Lifetimes / Fugui Performs Puppetry

02 [03:12] Jiazhen Leaves Fugui / Fugui Leaves His Old Home

03 [04:06] The Wounded Soldiers / Fugui Performs For The Army / Jiazhen Returns

04 [01:22] Pengxia Dies

05 [05:12] Fugui Takes His Son To School / Fugui Returns From The War / Erxi Fixes The House

06 [02:29] Fugui Performs At The Steel Works

07 [01:26] The 1950's

08 [06:59] Fengxia Leaves Her Parents / Closing Credits

09 [06:45] The Puppet Performance

매거진의 이전글 끝을 시작하는 니노 로타의 즐거운 행진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