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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05. 2015

그대 미소에 깃든 그림자

샌드파이퍼, 1965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로 시작해 <밴드 웨건>과 <파리의 미국인>으로 뮤지컬 영화의 전성기를, 그리고 <지지>로 그 화려한 끝을 본 빈센트 미넬리 Vincente Minnelli. 그는 할리우드의 4-50년대를 이끈 뮤지컬 영화의 거장이었다. 그러나 미넬리의 뮤지컬을 이루는 드라마와 로맨스와 유머는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다른 색깔의 꽃들처럼 멜로드라마와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미넬리가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었고, 새로운 장르 영화의 선구자로서 그의 다른 영화들을 살피게 했다. 


특히 인간의 삶에 깃든 애증의 공기를 느린 호흡으로 크게 들이마신 뒤, 다시 숨을 고르듯 천천히 스크린 위에 토해낸 미넬리의 멜로드라마는 통속적인 이야기에서 자극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야기를 관조하게 만드는 신묘한 매력이 있다. 자유분방한 미혼모와 보수적인 유부남 성직자의 조우. 그리고 그들의 짧은 사랑과 예정된 이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구설이나 신문 사회면의 가십으로 더 어울릴 남녀의 사연을 고백하듯 담담하게 풀어내는 <샌드파이퍼 The Sandpiper>에서도 빈센트 미넬리의 그런 힘이 느껴진다.


아스트루드 질베르토의 나긋나긋한 보사노바나 빌리 홀리데이의 보컬 혹은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의 재즈 넘버로 더 유명한 'The Shadow of Your Smile'은 사실 영화 <샌드파이퍼>를 위해 만들어진 테마곡이자 주제가였다. 작곡과 녹음 그리고 연주까지 1인 시스템으로 소화해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재즈 뮤지션인 자니 맨델 Johnny Mandel은 빈센트 미넬리로부터 이 영화의 음악을 제의받고, 감독이 <샌드파이퍼>를 한창 촬영하고 있을 때 로스앤젤레스의 허름한 식당 한편에서 10분 만에 이 곡을 작곡했다. 


사랑의 이면에 어린 쓸쓸한 그림자를 멜랑콜리한 선율에 품고, 그를 다시 노랫말로 적은 'The Shadow of Your Smile'은 아마도 이 영화가 허락한 유일한 심장인 것만 같다. 거기엔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이없는 표정 그리고 그들의 짓무른 속내가 담겨있다. 섬세한 기타음과 떨리는 플루트 그리고 트럼펫의 아련한 음색을 빌려서. 이 악기들이 자아내는 사랑의 기운은 주인공들이 거니는 인적 없는 해변의 바닷바람처럼 후덥지근하다.


<샌드파이퍼> 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Verve(1996)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 같이 메인 타이틀부터 시작해 톤과 리듬을 달리하면서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주선율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샌드파이퍼>를 위해 자니 맨델이 준비한 11곡의 스코어 중 10곡이 메인 테마인 'The Shadow of Your Smile'의 멜로디를 편곡한 것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영화음악과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 이색적인 작법은 미넬리의 영화를 바라보는 자니 맨델의 느낌이 작용한 결과였다. 작곡을 위해 <샌드파이퍼>의 러시 필름을 본 맨델은 미국이 아니라 서정적인 한 편의 유럽 영화를 감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인상을 음악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테마와 사운드 대신 묵직한 톤으로 밀어붙이는 이 영화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오로지 하나의 멜로디에 의지하고자 했다. 때문에 테마와 구성의 드라마틱한 전개라는 할리우드의 전통은 이 영화에서 톤과 멜로디의 섬세한 변주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샌드파이퍼>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화나 풍경화가 실린 도첩을 살피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빈센트 미넬리의 연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자니 맨델의 음악도 거기에 한 몫 단단히 하는 것 같다.


자니 맨델의 메인 테마가 영화 <샌드파이퍼>의 심장이라면, 그가 작곡한 'The Shadow of Your Smile'의 심장은 잭 쉘던 Jach Sheldon의 트럼펫 연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50년대 이후 미국 재즈계의 트럼펫터로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이 재즈 레이블인 버브(Verve)를 통해 발매될 수 있는 색다른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또 맨델로 하여금 그 해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게 했던 숨은 공신이기도 했다. 맨델의 쓸쓸한 멜로디를 아련하고 정갈한 연주로 완성하는 쉘던의 트럼펫은 사랑의 그늘로 허해진 가슴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한 가지 더 덧붙이면, 이 곡의 선율에 살짝 이국적인 느낌이 감도는 건 우연이 아니다. <샌드파이퍼>의 배경이 되는 미 서부 해안 도시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맨델은 이 테마곡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샌디에이고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스페인 이름을 딴 도시들을. 그가 선택한 이 스페인 풍 멜로디는 당시 미국 재즈씬을 휩쓸던 마일즈 데이비스의 트럼펫과 질 에반스의 재즈 오케스트레이션을 슬쩍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자니 맨델의 이 테마곡이 우리에게 익숙한 질베르토의 보사노바 리듬으로 쉽게 바뀔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덕분에 그의 <샌드파이퍼>는 할리우드의 전통을 탈피하려는 미국 영화음악의 새로운 경향을 최전선에서 반영한 사운드트랙이자, 60년대 중반 미국 재즈씬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재즈 음반으로도 사랑받았다.




01  [01:54]  The Shadow of Your Smile

02  [04:15]  Main Title

03  [02:27]  Desire

04  [05:00]  Seduction

05  [04:14]  San Simeon

06  [04:28]  Weekend Montage

07  [03:51]  Baby Sandpiper

08  [05:35]  Art Gallery

09  [02:36]  End Title

10  [02:14]  Bird Bath

11  [04:59]  Weekend Montage(Unedited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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