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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06. 2015

사운드가 이미지를 지배할 때

컨버세이션, 1974

<컨버세이션 The Conversation>은 독립영화나 다름없는 영화였다. <대부 The Godfather>가 흥행과 비평에 모두 성공하면서 영화 제작에 필요한 돈을 마련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Francis Ford Coppola는 <대부 2>의 제작에 앞서, 자비를 들여서라도 만들고 싶었던 영화의 시나리오 하나를 꺼내든다. 상업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에서는 누구도 투자를 꺼릴 자신만의 영화 시나리오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 Blow-Up>에서 영감을 받아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작업했지만, 좀처럼 제작에 착수할 자금도, 시간도 마련하기 어려웠던 그는 마침내 <대부>를 통해 이 영화를 만들 여력을 얻었고, 동시에 이 '작은' 영화로 <대부 2>에 대한 모종의 미끼로 활용할 심산이었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중심에 선 감독으로서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모순을 차례로 들춰보려는 그 젊은 호기는 결국 <컨버세이션>으로 하여금 그 해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게 했고, 이듬해 영국 아카데미 영화제는 최고의 사운드트랙으로 이 영화를 꼽았다. 작곡가 데이빗 샤이어 David Shire가 아니라 사운드 디자이너 월터 머치 Walter Murch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컨버세이션>에 대한 거의 모든 글에서 그 인상적인 영화음악을 언급하지만,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앨범으로 발매된 건 개봉으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2001년에서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영화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그 사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왜 작곡가 데이빗 샤이어가 아니라 편집 감독이자 사운드 디자이너였던 월터 머치에게 더 많은 관심이 쏟아졌는지. 


텔레비전 드라마와 저예산 영화를 위한 스코어를 만들던 데이빗 샤이어에게 프란시스 코폴라가 <컨버세이션>의 음악을 부탁한 건 73년의 일이었다. 자신의 매제(데이빗 샤이어는 코폴라 감독의 여동생과 결혼했다)인 샤이어를 눈여겨 본 감독은 몇 년 동안 다듬어 온 시나리오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에게 음악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오랫동안 진짜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샤이어는 기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샤이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코폴라 감독의 주문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오케스트라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음악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미니멀한 스코어를 원했던 것이다. 피아노 솔로가 아마도 영화의 콘셉트에 어울릴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살짝 실망한 채 집에 돌아갔지만, 열심히 피아노 테마곡을 만들어 온 그에게 코폴라는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영화의 상황과 분위기를 차근차근 다시 설명하려 애썼고, 몇 차례 그런 만남이 되풀이된 후에야 감독은 겨우 한 곡을 골라냈다. 그것도 완전한 테마곡이 아니라 그 테마가 품은 작은 악절 하나를. 


바로 그 멜로디로부터 영화 <컨버세이션>이 시작됐다.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음악의 콘셉트를 잡고 시작했기 때문에, 촬영과 동시에 본격적인 작곡이 나란히 이루어진 것이다. 배우들의 리허설과 촬영 스크립트를 지켜보면서 데이빗 샤이어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코폴라가 설명하려 애썼던 음악의 그림들이 어렴풋하게 그려졌고, 공들여 만든 그의 음악에서 아름다운 멜로디를 털어내기 위해 왜 그토록 감독이 노력했는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중년의 고독한 사나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닌 추악함을 들추는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내밀하고 스산한 분위기 자체가 영화가 되는 영화.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스케치하듯 휴대용 녹음기에 음악을 녹음한 샤이어는 영화의 러프 컷이 나올 무렵, 월터 머치를 만나 스튜디오에서 깨끗한 음질로 피아노 스코어 대부분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가 촬영 기간 내내 작곡한 이 스코어들은 영화의 편집 단계에서 새로운 사운드로 한 차례 더 가공됐다. 타인을 도청하는 사내의 불안을 그린 이 영화에서 프란시스 코폴라는 음악을 포함해 대사와 음향까지 거의 모든 사운드를 영화적 장치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속 해리가 작업했던 기계와 닮은 복잡한 전자 장비를 거쳐 음색을 변조하고 톤을 조절한 음악은 왜곡됐고, 일부는 멜로디 대신 소음 같은 소리로 대체됐다. 뿐만 아니라 투박한 음질을 위해 로우 파이(Lo-fi)까지 주저하지 않았던 감독은 깨끗한 음질로 녹음된 피아노 스코어 대신 데이빗 샤이어가 휴대용 녹음기에 녹음한 버전을 최종 편집본에 그대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영화음악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여겨졌던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이 <컨버세이션>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인 스코어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컨버세이션>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Intrada(2001)


음악을 하나의 사운드로 접근했던 코폴라 감독과 월터 머치를 통해 데이빗 샤이어가 작곡한 스코어는 제 모습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음악에서 그의 재능과 노력 역시 희미하게 사라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이 애초 마음에 들어했던 멜로디를 작곡한 것도, 또 그것을 발전시켜 이 영화의 메인 테마로 완성시킨 것도 모두 데이빗 샤이어의 손길을 먼저 거쳤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직 한 대의 피아노를 통해서. 


블루지한 재즈를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클래시컬한 피아노의 솔로 연주로 진행되는 선율을 작곡하면서 샤이어는 쇼팽을 떠올렸다. 도청업계의 전설로 꼽히지만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해리의 모습에서 사랑을 갈구하듯 로맨틱하지만, 감정을 통제하듯 치밀하고 절제된 연주로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피아노의 천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탁한 멜로디와 맑은 음색이 위태로이 균형을 이루는 야상곡 스타일의 테마곡 'Theme from The Conversation'은 그 결과물이다. 피아노라는 악기로 보여줄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의 잔상들이 그 짧은 악곡 속에 아른거린다. 어느 남녀의 대화를 도청하다 그만 자신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사내의 곤혹스러운 표정과 염려, 가책 그리고 번민이. 돈과 양심을 두고 저울질하는 해리 콜의 근심스러운 마음이 'No More Question / Phoning the Director'에선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침착하고 냉정한 멜로디로 시작해 한동안 주저하다가 결국 삐걱이는 화음이 건반 위에서 요동친다.


진실에 눈감은 사내의 괴로움이 성당의 고백으로 들려오는 'The Confessional'은 단선적인 멜로디를 시커멓게 뒤덮어버리는 후반부의 음험한 사운드가 일품이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해리의 고해성사를 경청하는 사제의 침묵이 무섭다. 불안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영화 속에서 해리가 연주했던 재즈곡 'Blues for Harry'에도 데이빗 샤이어의 손길이 녹아있다. 대학 시절 재즈에 심취했던 샤이어는 기분 전환을 위해 해리가 음악을 연주한다는 설정에 착안해 이 멋진 블루스 풍의 재즈 스코어를 만들었고,  작곡가뿐만 아니라 음악 감독으로서, 해리를 연기하는 진 해크만 Gene Hackman이 어색하지 않게 색소폰 연주 연기를 할 수 있도록 그의 곁에서 지도했던 것. 처음엔 서툴렀지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결과, 진 해크만은 차츰 그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실제로 해크만이 직접 연주한 버전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앨범에 수록된 재즈 캄보 버전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테너 색소폰의 거장 돈 맨자 Don Menza와 피트 졸리 Pete Jolly의 피아노, 레이 브라운 Ray Brown의 콘트라베이스, 셜리 맨 Shelly Man의 드럼 등 쟁쟁한 재즈 연주자들의 솜씨로 완성됐다.


영화의 초반에 사용된 샤이어의 오리지널 스코어들이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라면, 중반에 들어서면서 월터 머치에 의해 가공된 스코어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중 압권은 해리의 불길한 꿈이 묘사된 'Dream Sequence'. 멜랑콜리한 테마곡을 뭉개버리듯 거칠게 따라붙는 불안한 소음은 음악보다 음향에 더 가깝게 들리지만, 해몽할 수 없는  꿈같은 난해한 영화 속 이미지를 더없이 인상적으로 만든다. 해리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는 'Plumbing Problem' 역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곡. 살인이 예정됐던 호텔에 잠입해 뒤늦게 죽음의 흔적을 찾던 사내는 변기에서 핏물이 서서히 쏟아져 나올 때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차가운 피아노 음색이 사이렌 소리 같은 굉음과 파이프를 두드리는 소음 같은 사운드와 뒤섞여 극도의 공포감으로 밀려온다. 가히 버나드 허먼의 <사이코>에 비견될 만한 명장면, 명스코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찔한 반전이 담긴 'The Girl in the Limo'에서 뒤통수를 강타하는 듯한 물리적 충격은 그 사운드의 힘을 입어 심적인 충격으로 고스란히 전해질테니까. 철저하게 영화를 위해 만들어지고 가공된 음악이지만, 그 음악은 <컨버세이션>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운드가 이미지를 지배하는 드문 사례. 그리고 음악과 음향의 경계를 무너뜨린 폐허의 정서로 영화음악이 도달한 새로운 경지. 걸작이다.




01 [03:30] Theme from The Conversation

02 [01:36] The End of the Day

03 [02:16] No More Question / Phoning the Director

04 [02:38] Blues for Harry(Combo)

05 [02:37] To the Office / The Elevator

06 [02:06] Whatever Was Arranged

07 [02:18] The Confessional

08 [02:48] Amy's Theme

09 [02:32] Dream Sequence

10 [02:51] Plumbing Problem

11 [02:44] Harry Carried

12 [02:23] The Girl in the Limo

13 [03:52] Finale and End Credits

14 [02:27] Theme from The Conversation(Ensem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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