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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07. 2015

존 윌리엄스의 착한 품격

터미널, 2004

착한 품격이란 게 있을까. 존 윌리엄스 John Williams의 영화음악을 듣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회색과 검은색 위주의 수트를 즐겨 입는 영낙없는 뉴요커 스타일의 이 노장 음악가가 만든 스코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참 따뜻하다. 특히 커 보이는 영화 보다 작아 보이는 영화들에서. 깍쟁이 같은 인상에 주눅 들었다가, 착하고 소탈하기까지 한 심성을 보고 절로 경외감을 품게 되는 지경이랄까. 게다가 50년 가까이 착실한 납세자처럼 일 년에 한 편 이상 꼬박꼬박 멋진 스코어를 선보이고 있으니 성실함에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감독에게 쉬어가는 영화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블록버스터급 영화보다 흥행 부담은 좀 덜할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의 비교적 느슨한 영화에서도 존 윌리엄의 기품은  한결같다. 아니, <터미널 The Terminal>은 자신의 웬만한 블록버스터 영화음악보다 뛰어나다. 윌리엄스의 오리지널 스코어 대부분이 상향 평준화되어 있으니 <터미널>은 그야말로 으뜸 중에 으뜸, 금상첨화라 할 만하다.   


미국에 내렸으나 미국 땅은 밟을 수 없는 빅토르 나보르스키는 공항에서 산다. 그것도 잘. 그를 태운 비행기가 대서양을 건너는 사이 쿠데타가 일어난 조국의 여권과 비자가 몽땅 효력을 상실했음에도, 그래서 공항 내 환승 구역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음에도, 낙천적인 그의 천성은 강했고 생활력은 더 강했다. 으레 윌리엄스의 화려한 테마곡을 대동하고 시작하는 스필버그의 다른 영화들처럼 <터미널> 역시 인상적인 멜로디가 처음부터 고개를 내민다. 이름 하여 'The Tale Of Viktor Navorski'. 주인공 나보르스키를 위한 곡이자, 영화의 메인 테마다. 단음계의 곡조에 클라리넷을 덧대 왠지 애처롭게 들리지만, 베이스 노트의 무곡을 닮은 쾌활한 리듬은 비극의 여신이 아니라 희극의 여신을 향해 살며시 눈을 찡긋거린다. 잠시 뒤 아코디언이 동구권 나라 특유의 익살스러운 색채를 더하고, 다양한 목관악기와 현악기들이 가세해 한결 풍성해진 멜로디와 리듬이 영화에 화색을 돌게 한다. 


클래식으로 치자면, 오페라보다 발레곡에 더 가까운 존 윌리엄스의 영화음악은 캐릭터가 지닌 개성과 플롯을 압축해 전달하는 능력이 무척 뛰어나다.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아직 모든 인물이 등장하지도, 구체적인 사연을 내보이지도 않았지만, 윌리엄스의 테마는 몇 가지 실마리를 슬쩍 내보인다. 이 어리숙한 외국인이 의외로 잘 버틸 것이고, 어찌됐든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리라는 걸. 이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와 음악의 관전 포인트다. 


<터미널>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Decca(2004)


영화를 위해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할 때도 존 윌리엄스는 테마의 멜로디와 악기의 음색을 꼼꼼하게 계산하지만, 그것을 음반에 옮겨 담는 일 역시 게을리하는 법이 없다. 이 사운드트랙 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하면서 그는 자신의 스코어들을 영화의 흐름이 아니라 앨범을 즐기는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해 순서를 뒤바꾸어 놓았다. 아름다운 테마곡이라도 같은 멜로디의 변주곡이 연달아 나온다면 좀 지루해질 테니까. 영화의 흐름 상 다음 곡이 되어야 할 'Finding Coins And Learning To Read'가 앨범의 12번째 트랙에 실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영화의 교차 편집처럼 전혀 다른 멜로디의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번갈아 등장하는 이 곡엔 공항 이용객들의 무심한 움직임과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나보르스키의 놀라운 발견을 담아낸다. 카트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동전 한 닢을 얻을 수 있다는 작지만 큰 희망을. 어렵사리 모은 동전으로 햄버거를 사들고 크게 한입 베어 문 그 흐뭇한 표정이 눈에 선하다. 두 개의 다른 멜로디를 절묘하게 연결해 결국 나보르스키의 억척스럽고 순박한 면모를 드러내는 솜씨. 역시 존 윌리엄스다. 한편 영화에서는 다소 시간적인 갭이 있으나 또 하나의 짧은 스코어를 같은 트랙에 함께 뭉뚱그려 수록한 것 역시 곡목 리스트를 부풀리기보다 짧은 러닝 타임을 아쉬워하는 청자를 위한 윌리엄스의 숨은 배려다. 일차적으로 영화의 음악이지만, 그 음악으로 들을만한 음반을 만들겠다는 프로듀서로서의 고집이 엿보인다.  


대단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는 스필버그임에도 그의 영화에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꽤 드물다. 있다 해도 주재료가 아니라 양념장 정도. <영혼은 그대 곁에 Always>를 제외하면 거의 전무후무한 로맨스는 그의 콤비인 윌리엄스에게 변변한 러브 테마 하나 작곡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터미널> 역시 사정은 비슷하지만 나보르스키가 한눈에 반한 아멜리아와의 짧은 로맨스를 위해 윌리엄스는 모처럼 근사한 스코어를 선보일 기회를 얻었다. 바로 'Dinner with Amelia'. 프랑스 샹송 같은 산뜻한 멜로디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돋우다 돌연 탱고의 리듬으로 스탭을 바꾸는 이 웃음기 가득한 스코어로 나보르스키의 짧은 사랑과 행복은 잠시 미소를 띤다. 그의 로맨스를 이뤄주기 위해 인적 드문 라운지 한켠에 마련한 가짜 레스토랑의 종업원으로 등장하는 공항 친구들의 어설픈 몸짓도 음악에 재치 있게 배어있다. 


키보드의 영롱한 음색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The Fountain Scene' 역시 눈과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 곡. 거울과 유리 조각으로 만든 분수를 아멜리아에게 보여줄 때 나보르스키의 순한 애정을 담은 멜로디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피아노와 하프의 섬세한 선율로 상처 난 마음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것도. 그리고 이 멜로디는 마침내 그의 소박한 꿈이 이뤄지는 뉴욕의 재즈바에서 온전한 모습을 보인다. 피아노 솔로의 매력적인 즉흥 연주가 돋보이는 'Jazz Autographs'로. 영화음악가이기도 하지만 5-60년대 재즈 피아니스트로 클럽에서 활약한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 배인 감정을 멜로디로 바로 뽑아낸 영화음악이 있는가 하면, 그 감정을 이성의 통제 아래 정교하게 계산한 음악으로 다듬어낸 스코어가 있다. <터미널>은 후자에 가깝다. 아무리 사소하게 들리는 스코어라도 영화의 톤과 분위기를 두루 살핀 흔적이 사운드트랙을 듣다 보면 역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빈약한 멜로디를 풍성한 사운드로 가리려는 꼼수도, 또 뽐내듯 영화 위에 올라서려는 태도도 없다. 


결혼행진곡의 모티브를 품은 'The Wedding Of Officer Torres'나 영화적인 긴장감이 극에 달하는 'Gupta's Deliverance'에서도 존 윌리엄스는 무겁게 만들어진 스코어를 가볍게 풀어낸다. 마치 오랜 기간 피땀 흘려 연습한 프로 댄서가 무대 위에 올라 사뿐사뿐 스탭을 밟듯이. 그러나 크라코지아라는 가상의 나라를 위해 존 윌리엄스가 만든 장엄한 국가를 듣고 있으면, 그의 내공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에 새삼 놀라고 만다. 평범한 공항으로 보이는 영화의 배경이 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정교한 세트라는 사실에, 다소 뻔하고 말랑말랑한 영화의 결말보다 더욱 놀라게 되는 것처럼.




01 [04:12] The Tale Of Viktor Navorski

02 [08:02] Dinner With Amelia

03 [03:17] A Legend Is Born

04 [04:44] Viktor And His Friends

05 [05:33] The Fountain Scene

06 [05:02] The Wedding Of Officer Torres

07 [03:45] Jazz Autographs

08 [03:02] Refusing To Escape

09 [01:49] Krakozhia National Anthem And Homesickness

10 [03:17] Looking For Work

11 [03:18] Gupta's Deliverance

12 [04:03] Finding Coins And Learning To Read

13 [05:06] "Destiny"... "Canneloni"... And Tale Of Viktor Navorski Reprise

14 [02:47] A Happy Navorski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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