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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10. 2015

프란시스 레이와
미셸 르그랑이 만났을 때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1981

1936년 모스크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두 명의 아름다운 발레리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춤을 추었지만 경연에서 패한 타치아나는 심사위원이었던 보리스 이토비치와 결혼하고 아들 세르게이를 낳는다. 1937년 파리, 흑인 무희의 화려한 탭 댄스와 노래로 시작되는 폴리 베르제르 극장의 신년쇼 무대. 연로한 피아니스트가 연주 도중 숨을 거두자 새로운 연주자로 시몬이 고용되고, 그는 악단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안느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들에게 찾아올 시련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1938년 베를린, 나치의 깃발로 장식된 연주회장에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는 젊은 음악가 칼. 그의 빛나는 재능에 감명을 받은 히틀러는 칼에게 악수를 청한다. 1939년 뉴욕, 촉망받는 재즈 뮤지션 잭 글렌. 아내와 이제 갓 태어난 딸 사라와 함께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그는 라디오 뮤직홀에서 공연하던 도중 파리를 침공한 독일군의 소식을 듣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네 가정의 인생과 운명을 뒤흔들어 놓을 전쟁이. 그리고 예술혼을 불태우며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인생유전의 그 장대한 서막이.

 

거품 같기도, 샴페인 같기도 해, 파리!

파티는 그만 이제 돌아와요

창백한 얼굴, 어두운 노래는 그만두고, 파리!

스윙을 추러 가요, 장례식이 아니니까

회색보다 검은 색이 잘 어울려요, 파리!


끌로드 를르슈 Claude Lelouch의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Les Uns Et Les Autres>는 인생과 운명이 교차하는 무대, 파리를 그렇게 노래한다. 독일군의 품에 안겨서도 노래를 부르고, 그들을 물리친 미군의 손을 맞잡고도 춤추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열정의 도시 파리를. 반세기에 걸쳐 참혹한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음악과 춤, 기쁨과 슬픔 그리고 나와 타인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예술의 도시 파리를. 


세기의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오스트리아 태생의 명 지휘자 허버트 폰 카라얀, 재즈 트롬본 연주자 글렌 밀러 그리고 불행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노래에 담아 위대한 샹송 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에디트 피아프. 고통스러운 시간을 딛고 저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취를 이뤄낸 예술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은 를르슈는 그들 삶의 뜨거운 에너지를 영화로 옮기기 위해 5년 동안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를 기획했다. 좌절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의 삶에서 인생의 어떤 원형을 발견한 그는 여류 작가 윌라 케이터 Willa Cather의 잠언으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이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인생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두세 개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 세대는 다음 세대의 비판을 피할 수 없고, 세대는 또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간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l  SLCS(1994)


어머니에게서 딸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그리고 다시 손자에게로 이어지는 이들 인생의 행로는 하나의 테마곡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변주곡들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악기와 리듬으로 매번 새롭게 탄생하지만 그 뿌리를 이루는 멜로디의 자취는 결코 지울 수 없는. 끌로드 를르슈가 생각하는 인생의 원형은 이 영화의 음악과 그렇게 닮아있다. 그 때문이었을까. 뮤지컬 영화가 아님에도 를르슈 감독은 음악 작업을 끝마친 뒤에야 이 영화의 촬영에 들어갔다. 그것도 프란시스 레이 Francis Lai와 미셸 르그랑 Michel Legrand이라는 당대 프랑스 영화음악을 대표하는 두 명의 작곡가를 모두 데리고.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를 통해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맞춘 프란시스 레이와 미셸 르그랑. 그들의 손에서 탄생한 주옥 같은 곡들은 다채로운 멜로디가 되어 영화를 아름답게 수 놓는다. 비록 작곡은 프란시스 레이가, 편곡과 음악 감독은 미셸 르그랑이 맡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들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가지고 있기에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협력이자 곧 경쟁이기도 했다. 유서 깊은 폴리 베르제르 극장의 화려한 레뷔와 쇼를 위해 프란시스 레이가 카바레풍의 'Folies Bergeres'를 작곡했다면 미셸 르그랑은 아메리칸 스윙 재즈의 멜로디를 멋지게 재현한 'Serenade For Sarah'를 들려주고, 영화의 테마곡이 된 레이의 'Les Uns Et Les Autres'에 대해 르그랑은 'Un Parfum De Fin Du Monde'라는 정적인 음률로 그 활기찬 선율에 화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특유의 멜랑콜리한 감성을 소유한 프란시스 레이의 감미로운 선율 그리고 거기에 다시 액센트와 방점을 찍는 미셸 르그랑의 기막힌 편곡 솜씨. 영화의 숨은 주인공들처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로 음악을 주고받고 또 공유했을 두 작곡가의 모습이 즐겁다.


프란시스 레이와 미셸 르그랑의 곡들이 세대와 사연에 따라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며 40여 년의 시간을 따라 안느와 로베르 그리고 잭과 사라 글렌의 인생을 노래한다면, 발레와 자유를 좇아 프랑스로 망명한 세르게이와 '히틀러의 음악가'로 낙인찍힌 지휘자 칼의 가정을 둘러싸고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은 베토벤과 리스트, 브람스 그리고 쇼팽의 클래시컬한 선율에 실린다. 금세기 최고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모리스 베자르가 짜낸 화려한 몸짓과 함께. 손과 발 그리고 몸짓으로 음악을 이야기하는 예술가의 인생이 귀 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전해진다. 


유니세프 자선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파리의 토르카데오 광장에 열린 콘서트에서 영화는 마침내 절정에 이른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에 실려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갔던 네 가정과 그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칼이 지휘하는 조용한 볼레로 리듬에 맞춰 세르게이를 연기했던 조르쥬 돈의 세밀한 근육이 하나 둘 반응하고, 이내 빨간 원탁을 둘러싼 사람들이 군무를 추며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룰 때 거기에 더해지는 수잔과 파트릭의 거룩한 음성.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사연을 간직한 채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눈은 뜨거운 그 무엇으로 촉촉하게 빛난다. 이들의 사연만큼 무수한 별빛으로 가득한 파리의 밤 하늘 아래에서.




DISC 1

01  [04:08]  Folies Bergeres_ Catherine Russel + Ginette Garcin

02  [02:33]  Serenade For Sarah (instrumental)

03  [03:27]  Les Violons De La Mort

04  [03:37]  Les Allemands A Paris_ Nicole Croisille

05  [03:02]  Les Uns Et Les Autres

06  [04:14]  Un Parfum De Fin Du Monde_ Michel Legrand

07  [02:45]  Boris Et Tatiana

08  [02:14]  Paris Des Autres_ Liliane Davis

09  [04:55]  Dad And Co._ Jackie Ward

10  [03:38]  Ballet Apocalypse

11  [02:36]  Un Parfum De Fin Du Monde (instrumental)

12  [01:26]  Les Uns Et Les Autres (instrumental)

13  [02:22]  Paris Tes Degueulasse_ Ginette Garcin

14  [02:25]  Serenade For Sarah (instrumental)


DISC 2

01  [01:52]  Les Uns Et Les Autres

02  [01:11]  Body And Soul Incorporated_ Manuel Gelin + Francis Huster

03  [03:45]  Ballade Pour Ma Memoire_ Francis Lai + Liliane Davis

04  [04:45]  Serenade For Sarah (chant)_ Jackie Ward

05  [01:39]  Paris Des Autres (instrumental)

06  [02:27]  Paris Des Autres_ Ginette Garcin

07  [01:34]  Les Violons De La Mort (instrumental)

08  [02:26]  Dad And Co. (instrumental)

09  [01:21]  Les Uns Et Les Autres_ Michel Legrand + Catherine Russel

10  [02:10]  Un Parfum De Fin Du Monde_ Jean-Pierre Savelli

11  [16:20]  Bolero De Ravel_ Christane Legrand + Jean-Pierre Savelli

12  [04:21]  Pot Popur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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