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슈포르의 연인들, 1967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금방이라도 만날 것처럼 다가서다 자꾸만 어긋나던 인연들이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고 행복한 연인이 될 때까지. 멜로드라마라면 답답한 마음에 짜증이라도 냈겠지만, 순진한 낯빛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희망을 춤추는 이 화사한 뮤지컬은 좀처럼 역정 낼 짬을 주지 않는다. 상투적이라는 함정과 통속적이라는 빈 틈을 아크로바틱한 몸짓으로 사뿐히 뛰어넘는 리듬이 즐겁다.
영화를 만드는 내내 오로지 행복한 것만 생각했다는 자크 데미 Jacques Demy 감독은 <쉘부르의 우산 Les Parapluies de Cherbourg>을 적시던 안타까운 비구름을 거두고, 화창한 태양빛을 <로슈포르의 연인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에 들인다. 길 모퉁이의 작은 카페도 로맨스를 위해 존재할 것만 같은 이쁜 앵글에 담아서. 그 정경에 매혹된 잡지 파리 매치의 기자는 영화를 보고 난 뒤 그런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 영화는 '산다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영화'라고.
<로슈포르의 연인들>은 <쉘부르의 우산>과 이란성 쌍둥이 같은 뮤지컬 영화지만, 그 시작은 자크 데미의 데뷔작 <롤라 Lola>에서 비롯됐다.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 도시 낭트를 배경으로 첫사랑을 기다리는 여인과 세 남자의 연정을 그린 <롤라>는 '음악 없는 뮤지컬'을 모토로 삼은 영화였다. 흑백의 화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채 인물의 내면에서 공명하듯 부딪히는 멜로디와 일상적인 대사로 빚은 운율은 <롤라>에 리얼리즘과 릴리시즘을 동시에 불어넣었고, 이것은 아무리 사소한 말이라도 노랫말로 전해졌던 <쉘부르의 우산>의 밑바탕이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 자크 데미는 마침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할리우드 뮤지컬에 대한 애정을 담아 <로슈포르의 연인들>을 제작했던 것이다.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아이콘 진 켈리 Gene Kelly까지 특별히 캐스팅하면서. 항구를 소재로, 사랑을 주제로 비슷한 무늬의 다른 질감을 가졌기에 자크 데미가 연출한 이 세 편의 영화는 그의 '항구 3부작'으로 묶인다. 그리고 이 연작 영화의 공통점을 하나 더 꼽는다면, 영화의 표정을 닮은 음악을 선사한 미셸 르그랑 Michel Legrand이다.
유럽을 무대로 60년대에 활약한 수많은 영화음악가들처럼 재즈와 오케스트라, 클래식과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르그랑은 프랑스인의 감성으로 가득한 우아한 선율과 산뜻한 리듬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54년 연주곡을 중심으로 꾸민 앨범 [I love Paris]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누벨 바그의 잔물결이 일어나던 프랑스 영화계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그의 이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50년대 말부터 몇몇 프랑스 영화의 음악을 맡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르그랑의 영화음악이 누벨 바그와 함께 만개했던 건 자크 데미의 <롤라>부터다. 그리고 전례 없는 뮤지컬 <쉘부르의 우산>으로 정점을 찍은 르그랑은 데미 감독과 콤비를 이뤄 <로슈포르의 연인들>로 이어지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재치, 귀에 쏙 들어와 박히는 감미로운 멜로디, 매끈하고도 기발한 편곡. 르그랑의 음악에서 떠올릴 수 있는 매력이 여기에 다 있다.
테마의 바탕이 되는 멜로디 자체도 아름답지만 <로슈포르의 연인들>에서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편곡 아닐까. 스코어에 변주가 있다면 노래에는 편곡이 있다. 생기발랄한 쌍둥이 자매 델핀과 솔랑쥬 그리고 그녀들의 어머니 이본느가 집어든 사랑의 작대기 끝에는 어김없이 그와 짝을 이루는 사내들의 연가가 있다. 꿈에서 본 이상형을 찾아 헤매는 막상스, 길에서 잠시 스친 미지의 여인을 잊지 못하는 앤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그리워 로슈포르에 상점을 낸 시몽. 때로는 간발의 차이로, 때로는 한 사람을 건너 서로 만나지 못한 채 그들이 애타게 부르는 노래만이 누가 누구의 짝인지 슬그머니 귀띔해준다. 막상스가 부르던 노래가 델핀의 음성으로 다시 들리고, 솔랑쥬가 잃어버린 악보를 앤디가 연주할 때.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쟁곡처럼 우열을 가리기보다 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음악의 결을 입힌 곡들이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내며 한데 어우러진다.
호감을 품게 만드는 몇몇 곡이 슬쩍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관통하는 거의 모든 노래에 마음을 뺏기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그러나 <로슈포르의 연인들>은 아주 잘 차려진 멜로디의 성찬 같다. 살짝 감질나긴 하지만 그 성찬을 찬찬히 즐기다 보면, 영화를 본다는 것뿐 아니라 듣는다는 것이 한없는 행복처럼 느껴진다.
01 [03:15] Arrivee des Camionneurs
02 [03:21] Chanson de Maxence
03 [02:55] De Delphine a Lancien
04 [03:40] Marins, Amis, Amants ou Maris
05 [02:23] Chanson de Simon
06 [02:18] La Femme Coupee en Morceaux
07 [03:16] Chanson d'un Jour d'ete
08 [03:29] Chanson des Jumelles
09 [02:08] Chanson d'Andy
10 [02:33] Chanson de Solange
11 [02:31] Chanson de Delphine
12 [02:44] Nous Voyageons de Ville en Ville
13 [01:43] Chanson d'Yvonne
14 [03:10] Toujours, Jamais
15 [01:50] Depart des Camionne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