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뷰티, 1994
다작은 아니지만 캐롤린 톰슨 Caroline Thompson은 그녀의 감성을 반영하는 꽤 뚜렷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감독으로서. 그리고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흥미로운 키워드가 눈에 띈다. 팀 버튼과 원작 소설. 그렇다. <가위손>으로부터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유령신부>로 이어지는 팀 버튼 영화의 각본은 그녀의 손길을 거쳐 완성되었다. 팀 버튼과 만든 이야기들이 어른을 위한 동화라면, 원작 소설을 토대로 그녀가 직접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들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우화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비밀의 화원>, <머나먼 여정> 그리고 <블랙 뷰티 Black Beauty>.
1877년 애나 슈얼 Anna Sewell이 장애를 딛고 완성해낸 『블랙 뷰티』는 그녀의 삶에 위로가 되어준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을 출판한 뒤에도 슈얼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런 소회를 덧붙이곤 했다. '이것은 말에 대한 관심과 동정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해 특별히 씌어진 책'이라고. 물론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 끄트머리엔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에게 최선의 배려를 기울였음을 밝히는 캐롤린 톰슨의 짧은 코맨터리가 실려있다. 대니 엘프만 Danny Elfman의 가슴 뭉클한 멜로디를 깔고서.
팀 버튼과 대니 앨프먼의 돈독한 파트너십이 그동안 빚어낸 결과물들을 떠올린다면, <블랙 뷰티>는 크게 호감을 끌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과 영화음악가의 그런 특별한 관계 때문에 오히려 시야권에서 벗어난 숨은 걸작들이 더러 있다. <블랙 뷰티>의 오리지널 스코어도 그중 하나다. 푸르스름한 밤하늘에 걸린 하얀 달을 배경으로 영화의 타이틀이 박힐 때, 귀를 사로잡는 다정한 멜로디.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사운드 아래 잔잔히 흐르는 켈트 음악 특유의 목가적인 서정이 정겹다. 가만히 다가서는 그 클래시컬한 멜로디가 엘프만의 것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잠시 갸우뚱거리지만, 그의 전작 <써머스비 Sommersby>에 흐르던 윤기 나는 선율을 되새겨보면 이내 끄덕이게 된다. 팀 버튼의 음악적 페르소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작곡가로서 엘프만의 스펙트럼이 꽤 넓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면서. 그리고 이런 착한 영화에 착한 음악으로 맞장구를 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잃지 않고 감정을 조율해내는 그 능숙한 솜씨에 감탄하면서. <블랙 뷰티>의 영화음악은 대니 엘프만이라는 이름에서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것과 내심 기대하는 것들이 더해져 커다란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오래된 영국 민요를 닮은 멜로디를 깔고 담담하게 말을 걸어오는 블랙 뷰티의 목소리를 따라 처음으로 안내된 곳은 마구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경이로운 광경을 지켜보는 'Baby Beauty'는 메인 테마의 변주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엔 테마곡의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을 넘어서는 정교한 악기 구성과 우아한 품격이 돋보인다. 악기 고유의 음색을 펜으로 삼아 세밀한 삽화로 그린 동화책 같다. 대니 엘프만의 장기라면 장기 중 하나인 신비로운 첼레스타의 음색이 피아노, 페니 휘슬, 바이올린과 짝을 이뤄 망아지가 태어나는 순간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암말의 출산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부산함, 새끼에 대한 염려와 기대 그리고 새 생명을 맞이하는 기쁨 같은 것들이 벅찬 리듬을 타고 사랑스러운 멜로디에 차곡차곡 실린다.
어느덧 망아지의 티를 벗은 검은 말이 광활한 목초지를 질주할 때 한결 늠름해진 오케스트라 선율은 날렵하고 힘찬 박자로 보폭을 맞춘다. 흥미로운 대목이라면 엘프만은 정교한 메인 테마와는 또 다른 테마곡 하나를 더 보태 악곡을 융통성 있게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다. 한 곡의 메인 테마와 거기에서 파생된 변주로 밀어붙이기보다 파란만장한 말의 일생과 이 동물이 느끼는 감정을 서로 다른 두 개의 테마에 나누어 담은 것이다. 마치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처럼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또 쉬이 지루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 지점에서 <블랙 뷰티>의 가장 커다란 미덕이자 매력이 빛을 발한다. 하모니, 바로 조화로움이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 앨프만은 기괴한 아름다움과 서글픈 웃음의 접점을 음악으로 포착해 일찌감치 자신의 입지를 마련했다. 허나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블랙 뷰티>에서 선보이는 엘프만의 따스한 선율은 그의 영화음악 중에서 가장 '착한' 음악 축에 낄 것이다. 어쩌면 기괴한 것을 아름답게, 슬픈 순간을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역접 대신 감정과 정서를 순접으로 연결하는 것은 그에게 비교적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멜로디와 리듬까지 순접으로 완성시킨 스코어라 할지라도 영화와 조화를 이뤄내는 음악은 의외로 드물다. 수많은 영화음악가의, 수많은 영화음악이 있지만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또 기억에 남아 살아 숨 쉬는 영화음악이 드물듯이. 음악이 영화를 통해 매혹적인 멜로디, 적절한 리듬 그리고 완벽한 조화를 얻어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명작이라고 부르고 오랫동안 기억한다. <블랙 뷰티>는 그렇게 부르고 기억할만한 음악이다.
+) <블랙 뷰티>는 대니 엘프만이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던 시점과 맞물려있다. 그가 이 영화의 음악을 맡았던 것은 팀 버튼의 시나리오 작가인 캐롤린 톰슨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두 딸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엘프만의 스코어들 중 <블랙 뷰티>가 유난히 따스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지닌 것은 그 때문일지도.
01 [02:28] Main Titles
02 [04:37] Baby Beauty
03 [02:16] Gang On The Run
04 [00:53] Mommy
05 [01:01] Jump For Joy
06 [01:34] Kicking Up A Storm
07 [02:50] Dance / Bye Merrylegs
08 [03:16] Sick
09 [01:17] He's Back (revival)
10 [02:33] Frolic
11 [03:18] Ginger Snaps
12 [01:28] Goodbye Joe
13 [02:12] Wild Ride / Dream
14 [01:20] Is It Joe?
15 [02:37] In The Country
16 [03:49] Poor Ginger!
17 [04:56] Bye Jerry / Hard Times
18 [01:29] Memories
19 [01:52] End Cred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