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인, 1953
멀리 언덕에서 말을 탄 사나이가 느리게 다가온다. 덤불에 숨어 사슴을 지켜보던 꼬마의 시선은 낯선 사내의 실루엣으로 옮겨지고, 막연한 기대와 불안감으로 그의 형체를 좇던 아이의 눈이 커진다. 영화 <셰인 Shane>을 극장에서 봤던 50년대 미국 관객들 역시 눈이 휘둥그레해졌을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인해 점점 관객이 줄어가는 것을 걱정하던 영화사 파라마운트는 브라운관으로 구현해 낼 수 없는 와이드스크린을 발명했고, <셰인>을 통해 그 기술을 처음으로 선보였던 것이다. 와이오밍 주의 대자연이 파노라마로 담긴 이 영화의 근사한 오프닝이 지금도 가끔씩 회자되는 이유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더욱 큰 거리감으로 멀찍히 사라져가는 사내를 애타게 부르던 꼬마의 모습도.
비록 내가 이 서부극을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의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통해서였으나, 그때 느꼈던 여운은 길었고 오래갔다. 몇 년 전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무려 60년 만에 발매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셰인을 부르던 소년의 목소리와 메인 테마의 짧은 멜로디가 새삼 떠올랐으니까. 큰 화면으로 <셰인>을 본 적 없는 나는, 어쩌면 이 영화를 사운드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필모그래피를 다양한 장르로 채웠지만, 조지 스티븐스 George Stevens의 영화는 드라마로 더 유명하다. 특히 그가 50년대 선보였던 영화들. <젊은이의 양지 A Place in the Sun>에서 <안네의 일기 The Diary of Anne Frank>까지 이어지는 걸작들은 그를 할리우드의 50년대를 빛낸 감독 중 하나로 기억게 했다. 스티븐스의 드라마틱한 감성과 사실적인 연출이 빛을 발한 건 <셰인>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택했지만, 알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사나이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총에 대한 거부감을 넌지시 드러내는 감독의 시선은 <셰인>을 일찌감치 수정주의 서부극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샘 페킨파 역시 이 영화를 두고 그렇게 말했을 정도니까. "인디언 땅 위에서 벌어지는 살육은 재미 난 게임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 폭력성을 제대로 보여주진 않았다. 총 한 발에 세 명의 인디언이 나가떨어지곤 했고, 쓰러진 그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도 흔했다. 그러나 <셰인>에서 총잡이 윌슨이 토리에게 총을 쏜 이후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그렇다. 놀랍게도 <셰인>은 서부극임에도 총이나 총잡이의 세계를 숭배하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총이라는 도구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비극을 그린 영화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통신병으로 파견되어 처참한 전장을 직접 목격하고 그를 뉴스 필름에 담았던 스티븐스 감독은 총에 대한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서부극에 반영했던 것이다.
현실에 뿌리를 둔 사실적인 드라마에 대한 스티븐스의 애정은 그 영화음악에서도 드러난다. 화면의 움직임을 음악이 그대로 따라 하는 미키마우징(Mickeymousing)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스코어가 현실의 명암을 제대로 영화에 드리우길 원했다. 또한 흥미를 유발하는 짤막한 언더스코어보다 인물의 감정선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는 드라마틱한 선율을 선호했다. 한 작곡가와 일정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기보다 작품마다 매번 작곡가를 달리 한 것 역시 영화음악에 대한 그의 독특한 취향 중 하나였다.
<셰인>의 영화음악을 담당한 작곡가는 빅터 영 Victor Young. 지금 세대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했던 톱라인의 영화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과거 영화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된 <삼손과 데릴라 Samson and Delilah>나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80 Days>가 그의 테마곡 중 우리에겐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작품일 텐데, 의외로 그는 170 여편에 달하는 서부극의 스코어를 작곡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할리우드 작곡가들이 평균 30여 편의 서부 영화음악을 만들었으니 숫적으로도 월등히 많은 편수다.
현대 영화음악의 뿌리가 된 이 당시의 스코어들은 고전음악의 색채가 강했는데, 그중에서도 빅터 영의 음악은 장엄한 오페라나 대규모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연상시키는 큰 스케일이 두드러진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를 여읜 뒤, 폴란드에서 자란 그는 6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바르샤바 황립 음악학교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제자였던 로만 스타틀로프스키 Roman Statlovsky로부터 바이올린을, 파리 음악학교에서는 쇼팽의 후예인 이시도어 필립 Isidor Philipp에게서 피아노를 사사했다. 그의 영화음악에서 유럽 고전음악의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규모에서 압도하는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해 <셰인>의 프로덕션은 다소 소박한 편이었지만, 이 영화가 최초의 와이드스크린으로 상영된 작품이란 점에서 빅터 영이 큰 화면을 커버하는 작곡가로 발탁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30년대 말부터 그가 서부 영화음악을 작곡했다는 점 역시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는데 또 하나의 매리트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부극 치고는 느린 속도감을 가졌으나 대신 멜로디는 정교해졌고, 더욱 넓어진 스크린에 걸맞게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볼륨은 커졌다. 다만 이 사운드트랙을 통해 그 정교함과 웅장함을 느끼기에는 좀 역부족인데, 파라마운트사의 수장고에 모노로 녹음되어 있던 35미리 마그네틱 필름을 그 음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35미리 영화에서 스테레오 사운드가 비로소 가능해진 때는 돌비 스테레오 방식이 개발된 65년이었으니 이 당시 녹음 기술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던 셈. 이 시기의 영화음악을 담아낸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의 음질이 다소 떨어지는 이유다. 더구나 사운드트랙 앨범이 대중을 위해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좀 더 뒤의 일이어서 빅터 영의 <셰인>은 'The Call Of The Faraway Hills'라는 메인 테마가 싱글 커트된 레코드가 오랫동안 유일했다. 물론 영화에 사용된 버전이 아닌 레코드에 수록하기 위해 재녹음된 버전으로. 음질에 대한 부담감을 감수한다면 이 음반을 통해 <셰인>에서 빅터 영이 선보였던 매력적인 스코어의 면면을 충분히 만끽할 만하다.
짧고 힘찬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장엄한 멜로디로 시작되는 메인 타이틀부터 탁 트인 초원의 정경이 눈 앞에 그려진다. 멀리 솟아있는 로키 산맥과 우거진 숲 그리고 광활한 들판. 멜로디를 물감 삼아, 악기를 붓 삼아 완성한 거대한 풍경화 같다. 관현악을 중심으로 편성된 오케스트라 사이사이에 하프가 햇빛처럼 반짝거리고, 만돌린이 시냇물처럼 졸졸 흐른다. 스스로 전통과 거리가 먼 음악을 만든다고 호언했던 빅터 영의 말처럼 특이하게 구성된 악기들의 음색이 눈에 띄지만, 서로 조화를 이뤄 멜로디에 더할 나위 없는 윤기를 낸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색감을 슬쩍 더해 허를 찌르고 감탄을 자아내는 화가의 솜씨처럼.
폴란드의 무곡을 본뜬 바르소비엔(Varsovienne) 리듬을 스타렛 가족의 중심 테마로 활용한 대목에서는 빅터 영의 음악적 토대를 이룬 폴란드 음악에 대한 애정을 잠시 살필 수 있다. 마주르카에서 자주 사용되는 만돌린이 스코어에 골고루 사용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일 터다. 그러나 메인 테마를 비롯해 스코어들이 품은 멜로디 자체는 다분히 미국(혹은 그들의 뿌리인 영국)적이다. 스타렛 가족과 함께 기거하기로 결정한 셰인이 집 앞에 박힌 나무 그루터기를 도끼로 찍어낼 때 흐르는 'The Tree Stump'가 그중 대표적. 미국인의 개척 정신과 남성적인 힘을 과시하는 이 장면에서 빅터 영은 잉글리시 호른을 비롯 트럼펫과 트롬본 같은 금관악기를 중심으로 편성한 바로크풍의 힘찬 관현악으로 나무를 내려치는 남자들의 손에 힘을 실어준다.
하나의 테마를 끊임없이 변주하거나 편곡하는 현대 영화음악에 비해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 당시의 영화음악은 놀라울 만큼 변주곡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몇 개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가 되는 중심 선율을 이용해 주제와 상황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존 윌리엄스 John Williams를 비롯한 몇몇 영화음악가들이 현재에도 구사하는 수법으로, 멜로디 자체보다 정교한 악기 구성에 더 공을 들이는 이 작법은 오페라 작곡법에서 비롯됐다. <셰인>의 스코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역시 이 부분인데, 서로 대비되는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첼레스타와 피콜로 같은 악기로 순수한 동심을 포착한 악곡과 차갑고 웅장한 금관악기를 중심으로 비정한 총의 세계를 그리는 일련의 스코어들은 멜로디뿐만 아니라 그것을 연주하는 악기의 음색으로도 무게감과 온도를 달리한다.
조이의 모습이 담긴 천진난만한 선율(Pastroal)과 대조를 이루는 단조와 불협화음(Trouble Ahead)은 라이커 일당의 음모와 위협을 예고한다. 영화의 드라마틱한 긴장감이 오페라틱한 음악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영화의 주인공은 셰인이지만 빅터 영은 그보다 스타렛 가족, 좀 더 정확하게는 소년 조이에 초점을 맞춘 서정적인 선율을 만들었다는 것. 묘연한 과거를 지녔지만 예사롭지 않은 총솜씨로 미루어, 셰인은 한때 그가 몸담았던 비정한 총잡이의 세계를 떠나 한적한 시골 마을의 촌부로 정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에 피를 묻힌 이후 그는 어두운 세계와 좀처럼 단절하지 못했고 이번에도 실패했다. 셰인의 비극적인 현실이, 어린 조이의 눈에는 영웅적으로, 그리고 낭만적으로 비춰질 뿐이다. <셰인>의 마지막 장면에는 그래서 묘한 슬픔과 여운이 감돈다.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셰인을 애타게 부르던 조이의 목소리와 무심할 정도로 아름다운 빅터 영의 테마곡이 왠지 알싸한 기억으로 내게 남은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01 [02:08] Main Title(Prelude)
02 [02:28] Starrett's Plans
03 [02:00] The Tree Stump
04 [02:43] Pastoral
05 [01:38] Off To Town / Grafton's Store
06 [02:46] Wyoming Sketches
07 [01:42] End Of Fight / Victory And Trouble
08 [06:10] Tender Moments / Wilson / Ride And Memories
09 [02:17] The Fourth Of July / A Tough Torrey
10 [08:22] Trouble Ahead / Torrey's Death / Taking Torrey Home
11 [05:09] Cemetery Hill
12 [03:18] Peace Party
13 [03:06] Sad Is The Parting
14 [06:28] The Ride To Town
15 [04:18] Apotheosis And End Title
16 [02:03] Beautiful Dreamer / Marching Though Georgia
17 [04:17] The Ride To Town(Film Version)
18 [04:15] Apotheosis And End Title(Film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