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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18. 2015

정중동(靜中動)의 영화음악

문작, 2008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촬영한 곳에 가보고 싶다고 느낄 때가 간혹 있다. 영화가 마음에 들수록, 영화를 채우는 어떤 장면이 마음을 건드릴수록 그렇다. 영화음악을 찾아 듣는다는 것은 문득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그런 충동과 닮은 구석이 있다. 영화 속에 무심히 흐르던 어떤 멜로디에 깊이 매료될수록, 장면에 포개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어떤 선율이 인상적일수록 온전한 모습으로 음악의 실체를 만나보고픈 마음이 부쩍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흔히 두 가지로 돌아온다. 영화에서 본(혹은 들었던) 것 만큼 멋지거나, 아니면 의외의 초라함에 실망하거나. <문작(文雀)>은 한 번쯤 홍콩에 가보고픈 마음이 들게 하는 영상에, 찬찬히 사운드트랙 앨범을 살펴보고 싶게 만드는 음악을 가졌다.


뮤지컬로 보기는 어렵지만, <문작>을 보고 나면 한 편의 뮤지컬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것도 좀 오래된. 왜 일까. 아련한 빛과 색감과 소품으로 이쁘장하게 담아낸 구룡 반도의 정경 때문일까? 폭소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소는 충분히 자아내고도 남을 배우들의 유머러스한 제스처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커터 날을 머금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춤을 추듯 범행을 저지르는 소매치기 장면 때문이었을까? 이쁘고 유머러스하며 춤을 추듯 매끄러운 리듬감을 가진 영화. 단지 하나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문작>을 이루는 그 모든 것들이 아마도 이 영화로 하여금 뮤지컬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포착하고 포장하는데 있어서 만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두기봉(杜琪峰) 감독은 서사보다 미학적인 부분에 더욱 공을 들인 영화를 만든다. 이것은 비단  두기봉뿐만 아니라 홍콩에 적을 둔 액션이나 권격 영화 감독들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한데, 이야기 자체보다 볼거리에 치중하는 이 같은 태도는 태동기부터 오로지 흥행만을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해야 했던 홍콩 영화산업의 체질적인 특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장르의 컨벤션에 충실한 홍콩 영화들은 비슷한 스토리를 취하는 대신 저마다 색다른 플롯과 볼거리에 승부를 건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결말보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얼마나 악독한지, 복수를 꿈꾸는 이는 어떤 깊은 원한에 사무쳤는지, 그리고 그 둘이 어떠한 초식과 권법으로 합을 겨루게  될지가 영화 비주얼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 것이다. 시나리오의 힘보다 카메라의 힘에 더 의지하는 이런 홍콩 영화의 작법은 편집을 통한 속도의 조절(혹은 왜곡)로 상대적인 시간이 물리적 시간보다 더욱 사실적이고 드라마틱하며 또한 영화적인 재미까지도 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했다. 다만 과거 권격 영화들이 2배속에 가까운 속도와 척척 맞는 호흡으로 '손도 보이지 않는' 권법가들의 면모를 과시했다면, 90년대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리스트들은 오히려 슬로우 모션이 만들어내는 느림의 미학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쾌감에 주목했다. 그리고 정확히 이 지점으로부터 영화음악은 홍콩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오우삼과 서극 그리고 왕가위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두기봉 감독의 영화 역시 인상적인 장면 아래 정교한 사운드트랙이 깔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로는 밤의 비장한 멜로디로, 때로는 낮의 산뜻한 리듬으로. 


<문작>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Naive(2008)


은하영상유한공사(銀河影像有限公社)를 통해 십 수년간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두기봉의 영화들 사이에서도 <문작>의 스코어는 단연 돋보인다. 무성영화 시절의 미키마우징과 스윙감으로 넘실대는 모던 재즈와 라운지 음악 스타일의 그루비한 리듬에, 남성의 개구진 스캣과 얼후(二胡)의 카랑카랑한 음색으로 추임새를 넣는 사운드 디자인은 근래 보기 드물어진 오리엔탈 영화음악의 황홀경을 맛보게 한다. 


<매드 디텍티브 Mad Detective> 이후 두기봉 사단의 작곡가 목록에 오른 자비에르 자모 Xavier Jamaux와 다양한 장르에서 물려받은 스타일을 취합해 좀처럼 규정하기 어려운 질감의 사운드를 뽑아낸 프레드 에이브릴 마뇽 Fred Avril Magnon은 이 영화에 어린 아련한 느낌을 고스란히 사운드트랙으로 끌어들인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프랑스 태생이지만 <문작>에서 그들이 구사하는 멜로디의 기조는 다분히 동양적이라는 것. 그것도 적당히 현대화되고, 적당히 서구화된 동양의 멜로디. 그 자체가 이미 홍콩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포착한 절묘한 음감이지만, 두 사람은 그쯤에서 만족하지 않고 두기봉의 시선으로 필터링된 영화 속 홍콩의 이미지를 거드는 사운드에도 신경을 쓴다. 이를테면, 크림색 양복을 걸친 주인공이 자전거로 홍콩의 뒷골목을 누비는 모습이 로맨틱하게 보이는 건 'Simon's Ride'의 정겨운 리듬 덕분이다.


이미지와 어울려 향수를 자극하고 분위기와 감정을 고조시키는 감각적인 음악이 <문작>에는 수없이 등장하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을만한 빗속의 소매치기 대결 장면에서 스타일리시한 이미지와 음악의 조합은 최고의 정점을 보여준다. 'Ballet of the Umbrella'라고 이름 붙인 스코어의 타이틀과 9분에 달하는 이 곡의 긴 러닝 타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발레처럼 우아한 영화 속 슬로우 모션은 무성 영화 혹은 경극의 한 장면을 지켜보는 것 같은 아득한 감흥마저 불러일으킨다. 


아무런 대사 없이 배우들의 몸짓만으로 이뤄진 영상에 흐르는 정중동(靜中動)의 음악. 그것은 화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는 효과음이며, 들리지 않는 무언의 대사 그리고 긴장과 유머를 간직한 플롯 그 자체다.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를 구성하는 개개의 플롯을 위해 존재하는 그 음악에 실려 <문작>의 미스터리 한 분위기는 그들이 탐하는 옥처럼 묘한 빛을 발하고, 매혹의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해진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이 놀라울 만큼 제거되어 있음에도 이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그래서 <문작>의 영화음악은 두기봉의 영화를 반하게 만드는 절대 매력이자,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화에 음악이 불어넣은 생기가 새삼 축복임을 깨닫게 한다.




01 [02:52]  Opening

02 [04:09]  Pickpockets(Theme from Sparrow)

03 [03:02]  Smoking in a Coupé

04 [02:19]  Simon's Ride

05 [01:24]  Gimme a Lift

06 [02:30]  Vertigo - The Ambush

07 [04:02]  Pickpockets in Disguise

08 [00:28]  Sparrows

09 [02:44]  Mister Fu

10 [01:05]  Alone at Night

11 [02:54]  Smoking in a Coupé - alt. version

12 [09:22]  Ballet of the Umbrellas

13 [01:02]  The Bay

14 [02:39]  Fishes in a Lift 

15 [01:25]  Friends after All

16 [01:23]  End Theme

17 [01:24]  Pickpockets (Rep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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