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L Oct 20. 2015

탱고라는 이름의 평등

세 가지 색: 화이트, 1994

<세 가지 색 화이트 Trois Couleurs Blanc>는 코미디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어쩌면 더 코미디 아닐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Krzysztof Kieslowski가 자신의 영화를 두고 스스로 평했던 것처럼, 그것도 블랙 코미디.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그가 세 개의 연작 중 비교적 쉬운 은유와 역설로 <화이트>를 만든 건 누구나 '평등하게' 자신의 응큼한 코미디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3년 11월을 기해 발효된 마스트리흐트 조약. 그로써 정치와 경제의 통합체인 유럽연합이 오랜 산고 끝에 탄생했지만 모든 회원국들이 당장 동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회주의 시스템에 오랫동안 머물러있던 동유럽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프랑스 여인 앞에 힘없이 고개 숙인 폴란드 남자, 카롤처럼.


이성은 차이점을 탐색하지만, 감성은 공통점을 모색한다. 이는, 차이가 모종의 구분과 계급을 만들어내는 반면 공통점이 통합과 평등을 지향하는 속성과 상통한다. 카롤에게서 평등과 연관된 어떤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 건 그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감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수중에 가진 돈은 얼마 없어도 사랑하는 여인을 닮은 골동품 조각상에 온 마음을 빼앗기는. 비록 그 감성으로 싹을 틔운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지만, 정작 부부생활은 감성만으로 지속되긴 어려운 일. 결국 그는 버림받는다. 도미니크의 새하얀 면사포와 법관이 눌러쓴 은색 가발로 결혼과 이혼의 절차가 무미건조한 화면에 시간차로 담길 때 즈비그니에프 프라이즈너 Zbigniew Preisner는 창백한 지속음으로 백색의 이미지를 좇는다. 음계를 오르내리지 않는 'The Beginning'과 평평한 느낌의 미니멀한 솔로 연주곡인 'The Court'로. 멜로디도 화음도 희미하게 퇴색되어 버린 그 곡조에서 특별한 감흥을 얻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생기를 잃어버린 두 사람의 관계만큼이나. 다만 신음 같은 소리를 내고 이내 사라지는 음색에 서먹한 여운이  감돌 뿐이다.  


<화이트>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EMI(1994)


그러나 카롤이 미콜라이를 만나 폴란드로 돌아간 시점부터 매혹적인 하나의 테마가 영화 속에 펼쳐진다. 동유럽 특유의 서늘한 멜로디 라인을 가졌지만 그 리듬 만큼은 정열적인 탱고. 바이올린의 경쾌한 연주로 2 박자의 리드미컬한 선율이 카롤의 귀향을 알리는 전령처럼 화면을 채울 때 상처받은 남자의 허한 가슴도 무언가로 채워진다. 속절없는 결혼에 대한 회한, 어여쁜 아내에 대한 미련, 사랑을 되돌리고픈 헛된 욕망 그리고 차갑게 식은 복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포커페이스를 하고 폴란드의 겨울 하늘 아래 사뿐히 내려앉는 관능적인 리듬에 그 복잡한 감정들이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심플한 멜로디로 감정의 타래를 솜씨 좋게 엮어내는 영화음악에 강한 호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탱고라는 춤곡으로 은유하는 힘의 아슬아슬한 균형이라니. 다정한 손길로 서로 밀고 당기는 매혹의 몸짓, 동시에 그 안에 도사렸던 팽팽한 긴장감이 칼끝처럼 예리한 현악 연주로 들춰진다. 프라이즈너는 감독이 건네준 시나리오를  읽어내려 가면서 '춤은 수평적 욕망의 수직적 표현'이라 칭했던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의 말을 악상으로 떠올린 것일까. 폴카도, 왈츠도 아닌 탱고로. 음악의 방점은 이때 욕망에 찍힌다. 대놓고 말하기엔 겸연쩍지만(그리고 그것이 연작 영화 중 <화이트>에 대한 호감도가 다소 떨어지는 이유로 짐작되지만) 물질과 성의 불평등한 관계가 성욕에서 물욕으로, 그리고 다시 성욕으로 연쇄하는 과정을 통해 평등의 의미가 되새겨지는 것은 <화이트>의 해악이 아니라 해학일 것이다. 사람들 모두 가지려 하는 것을 좇고, 결국엔 사람들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이가 되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욕망을 불편하게 풍자하는.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이제 기회의 평등이 새로운 시대의 리듬임을 간파한 카롤은 좋게 말하면 억척스럽게, 나쁘게 말하면 우악스럽게 돈을 긁어모은다. 그야말로 수평적 욕망의 수직적 체현인 셈이다. 어느새 냉혈 사업가로 변모한 카롤의 탱고는 포마드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 같은 매끈한 윤기를 뽐내며 그의 수완과 처세술을 칭송한다. 같은 탱고지만 멜로디는 더 비정하고 음색은 더 날렵하며 리듬은 더 교묘하게 들리는 건 카롤의 그런 변화 때문일까, 아니면 스코어의 편곡 때문일까. 확실한 건 카롤의 가슴에 불을 댕긴 욕망은 도미니크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끝 역시 도미니크를 향해 있다는 것. 사랑도, 미움도, 복수도, 용서도.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는 탱고처럼 사랑은 두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일방이 아닌 쌍방의 교감을 통해 완성된다. <화이트>에 흐르는 탱고는 그 평범한 세상의 이치와 평등의 의미를 다시 생각게 한다.




01 [01:17] The Beginning

02 [01:04] The Court 

03 [01:14] Dominique Tries To Go Home 

04 [02:11] A Chat In The Underground

05 [01:26] Return To Poland

06 [01:23] Home At Last

07 [01:12] On The Wisla

08 [00:49] First Job

09 [00:46] Don't Fall Asleep

10 [01:21] After The First Transaction

11 [01:23] Attempted Murder

12 [01:49] The Party On The Wisla

13 [00:53] Don Karol I 

14 [00:37] Phone Call To Dominique

15 [01:30] Funeral Music

16 [00:54] Don Karol II

17 [02:26] Morning At The Hotel

18 [01:48] Dominique's Arrest

19 [01:25] Don Karol III

20 [02:25] Dominique In Prison

21 [02:27] The End

매거진의 이전글 정중동(靜中動)의 영화음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