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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23. 2015

비극의 스펙터클

타워링, 1974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늘 좋은 시나리오를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먼저 판권을 차지하기 위해 제작자들이 밤새 들춰본 시나리오는 주로 재난에 관한 내용이었다. <에어포트>와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세계적으로 흥행한 뒤 재난영화를 새로운 하위 장르로, 영화 산업에 활력을 가져다 줄 또 하나의 금맥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두 메이저 영화사가 비슷한 소재의 비슷한 시나리오로 격돌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제작한 20세기 폭스는 다시 한 번 대박을 터뜨리기 위해 『글래스 인페르노 The Glass Inferno』의 시나리오 판권을 일찌감치 사들였고, 경쟁사인 워너 브라더스 역시 리처드 마틴 스턴 Richard Martin Stern의 소설 『타워 The Tower』의 영화화 판권을 출판되기도 전에 미리 손에 넣었던 것. 


만만치 않은 대결이 되리라 내다봤던 호사가들의 예상과 달리 두 영화사의 대결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할리우드 영화사에 유례없는 제작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 영화 <타워링 The Towering Inferno>은 두 제작사가 판권을 가진 시나리오 제목에서 각각 단어를 따와 최종 개봉 타이틀이 붙여졌다. 그 역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작명법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영화사의 공동 제작은 <타워링>의 시나리오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고, 당대 스타급 배우들의 동시 캐스팅을 가능케 했으며, 그에 걸맞은 특수효과팀과 프로덕션팀을 꾸릴 수 있게 했다.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음악가들의 대를 이어 이제 떠오르는 신예로 인정받기 시작한 존 윌리엄스 John Williams 역시 제작자 어윈 알렌의 파트너로서 곧바로 새로운 재난에 필요한 음악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공을 들여 야심 차게 개봉한 영화는 대성공을 거둔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타워링>을 연이어 제작한 어윈 알렌에게는 '재난영화의 대가'라는 찬사가 붙여졌고, 같은 해 개봉한 또 하나의 재난영화 <대지진>까지 작곡한 존 윌리엄스는 블록버스터 영화라면 이제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영화음악가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공동으로 영화를 제작했기에 비디오와 DVD의 출시를 두고 두 영화사가 권리를 조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악 프로덕션 역시 20세기 폭스사가 영화음악의 녹음을, 레코드 회사인 워너 뮤직을 소유하고 있던 워너 브라더스사가 사운드트랙 앨범 제작과 배급을 담당하면서 영화 개봉 당시인 1974년 LP가 잠시 발매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 팬들의 끊임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25년 가까이 <타워링>은 까다로운 저작권 협의로 인해 사운드트랙이 발매되지 못했다. 공동 제작이 앨범 제작에는 오랜 걸림돌이 된 셈이다. 그리고 2001년, 영화음악 레이블인 필름 스코어 몬슬리(Film Score Monthly)가 전 세계 3000장 한정 발매를 조건으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내놓으면서 <타워링>의 영화음악은 비로소 그 빛을 보게 됐다.


스코어 자체의 완성도를 거론하기 전에 <타워링>은 존 윌리엄스의 영화음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 영화음악을 통해 그의 스타일의 한 축을 이루는 모종의 프로토타입(특히 블록버스터 영화에서)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등장인물과 주요 스태프 그리고 영화 제목을 소개하는 오프닝 타이틀부터 뚜렷한 멜로디와 임팩트 강한 리듬으로 귀를 사로잡는 웅장한 테마곡, 또한 그를 중심으로 한두 개의 러브 테마를 짝지우는 작법은 <슈퍼맨>과 <스타워즈>  시리즈뿐만 아니라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이르기까지 존 윌리엄스의 영화음악을 관통하는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타워링>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FSM(2001)


샌프란시스코의 마천루 사이로 우뚝 솓은 138층의 글래스 타워. 초고층 빌딩으로 접근하는 헬기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오프닝은 헬기가 내는 소음 대신 존 윌리엄스의 다이나믹한 메인 타이틀곡을 배경음으로 삼는다. 윌리엄스의 전매 특허라고 할 수 있는 현악 오스티나토로 비행하는 헬기에 박진감과 생동감을 불어넣고, 금관악기가 터트리는 팡파르로 현대의 테크놀로지가 쌓아 올린 건축물의 위용을 과시하면서. 현장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화음악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리는 이 오버스코어(Overscore)는 이제 막 스크린 위에 펼쳐진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위험과 희생 그리고 비극의 스펙터클이라는 재난영화의 이미지를 그 선율에 차례로 아로새긴다.


시각적인 특수효과가 강조된 재난영화지만,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제작한 어윈 알렌은 영화 속 재난을 단지 구경거리가 아니라 안타까운 비극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드라마에 있음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뿐만 아니라 부정(父情)과 모정(母情) 그리고 이타적인 행동으로 타인의 목숨을 구하는 인물들의 사연과 함께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 역시 필요했다. 거의 모든 영화 장르에서 음악을 필요로 하지만, 드라마와 스릴러는 영화음악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만큼 유독 이 두 장르에서 음악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건축가이지만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낙향하려는 로버츠와 그의 행복한 연인 수잔을 위한 로맨틱한 테마곡 'Something for Susan'에 이어 뮐러 부인과 사기꾼 할리의 테마곡 'Lisolette and Harlee'의 나긋나긋한 재즈 음악은 그들에게 닥칠 화마를 크나큰 비극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플루트와 전자 피아노의 에로틱한 멜로디가 젊은 연인을 위한 것이라면, 이지 리스닝 계열의 편안한 연주가 돋보이는 테마곡은 노년의 커플을 위한 것이다. 특히 이 영화의 주제가이자 사랑의 테마인 'We May Never Love Like This Again'은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주제가를 만들었던 알 카샤 Al Kasha와 조엘 허쉬혼 Joel Hirschhorn의 합작품. 가수 모린 맥거번 Maureen McGovern이 카메오로 등장해 직접 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사무실에서 몰래 밀회를 즐기다 변을 당하는 댄과 그의 비서를 위해 존 윌리엄스는 그 러브 테마 일부를 'Trapped Lovers'에 사용했다.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사랑을 나누다 불길 속에서 최후를 맞는 연인을 위해 그가 왜 이 멜로디를 선택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진 않으리라. 


<타워링>에서 러브 테마와 함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스코어들은 화재의 공포와 서스펜스에 밑줄을 긋기 위한 것이다. 묵직한 저음의 현악 연주로 점화된 불씨의 잠재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The Flame Inites'로 시작된 일촉즉발의 위기는 'The First Victims'에서 현실이 된다. 소방관을 도우려다 심각한 화상을 당하는 윌, 연기 속에 방치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뮐러 부인 그리고 로버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앞다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는 순간에 맞춰진 이 스코어에는 피아노 오스티나토로 불길한 조짐을, 신경질적인 현악 연주로 화마의 공포를, 그리고 폭발하듯 두드리는 타악기로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멜로디보다 리듬이 두드러진 전위적인 스코어지만 맹렬한 기세의 불길처럼 치솓는 음악의 열기가 음향보다 더 강렬한 충격과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실재하는 것처럼 믿게 만드는 특수효과나 정교한 세트 만큼 음악 역시 영화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도구다. 존 윌리엄스는 <타워링>에서 자주 오버스코어를 구사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당시 영화의 음악은 다소 부족한 음향 효과까지 부분적으로 보완해주는 역할도 담당했다는 것. 예를 들면, 로버츠가 콘크리트로 막힌 문을 열기 위해 수직으로 뻗은 배관 기둥을 지나며 아래를 내려다 볼 때 깊숙한 지하로부터 들려오던 으스스한 쇳소리는 사실 음향 효과가 아니라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음악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Down the Pipes / The Door Opens'에는 바로 그 장면에 아슬아슬함을 더하는 기괴한 타악기 음색이 위태로운 멜로디에 덧붙여져 있다.  


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점점 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Planting the Charges'는 이 영화와 사운드트랙의 하이라이트다. 최후의 수단으로 거대한 물탱크를 폭파시키기 위해 옥상으로 향하는 소방대장과 로버츠. 메인 타이틀에 흐르던 낯익은 테마가 긴박한 리듬으로 다시 등장하고, 낮게 깔린 베이스 클라리넷과 하프가 초조하게 연주되는 동안 두 사람은 조심스레 폭약을 설치한다. 마침내 시한폭탄이 세팅되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두 사람. 트럼펫과 호른의 긴장스러운 리듬이 새로운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한가닥 줄에 의지해 운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리고 폭발. 조를 바꿔 수미쌍관으로 배치한 메인 테마로 긴장감의 강도를 조절하고, 다시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관현악 리듬이 전체적으로 꽉 짜인 이 스코어로 존 윌리엄스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낸다. 장면에 매몰되지 않고, 그렇다고 영화를 매몰 시키지도 않는 노련함으로. 영화음악이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않아야 할 때를 제대로 판단하는 이 노련함이야말로 탁월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능력보다 어쩌면 더 얻기 어려운 존 윌리엄스의 미덕이자 비결일 것이다.




01 [05:01] Main Title

02 [02:42] Something for Susan

03 [02:35] Lisolette and Harlee

04 [01:01] The Flame Ignites

05 [01:55] More for Susan

06 [01:37] Harlee Dressing

07 [00:37] Let There Be Light

08 [00:51] Alone at Last

09 [02:04] We May Never Love Like This Again(film version)_ Maureen McGovern

10 [03:24] The First Victims

11 [01:18] Not a Cigarette

12 [04:44] Trapped Lovers

13 [02:18] Doug's Fall / Piggy Back Ride

14 [03:07] Lisolette's Descent

15 [02:59] Down the Pipes / The Door Opens

16 [03:38] Couples

17 [02:26] Short Goodbye

18 [03:07] Helicopter Rescue

19 [01:12] Passing the Word

20 [09:04] Planting the Charges

21 [03:57] Finale

22 [03:28] An Architet's Dream

 

Bonus material

23 [02:13] We May Never Love Like This Again(album version)_ Maureen McGovern

24 [02:07] The Morning After(instrumental)

25 [02:33] Susan and Doug(album track)

26 [01:03] Departmental Pride and the Cat(damaged)

27 [02:34] Helicopter Explosion(damaged)

28 [02:39] Waking Up(dama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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