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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30. 2015

헨리 맨시니 스스로 꼽은
자신의 베스트

언제나 둘이서, 1967

댄서와 안무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해 MGM 영화사의 대표 감독이 된 스탠리 도넌.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는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색다른 영화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채워갔다. 특히 뮤지컬 영화의 인기가 사그라들 무렵, <화니 페이스>로 만난 오드리 햅번과의 인연을 되살린 두 편의 영화는 그의 연출력이 오로지 뮤지컬에만 있지 않음을 증명했다. 로맨틱 코미디에 스릴러를 접목한 <샤레이드> 그리고 연애라는 추억과 결혼이라는 현실을 시간차로 그려낸 멜로 드라마 <언제나 둘이서>가 그것이다. 스릴러와 멜로라는 장르 특유의 색깔에 로맨스의 달달한 향기를 더해 한층 감각적인 영화를 빚어낸 건 분명 스탠리 도넌의 솜씨겠지만, 그를 가능케 한 건 오드리 햅번이라는 빛나는 존재와 헨리 맨시니의 매혹적인 음악이 함께 해서였다. 


햅번이 출연한 다른 작품에 비해 인지도는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언제나 둘이서>는 눈여겨 보고 귀담아 들을만한 구석이 많은 영화다. 귀여운 숙녀의 티를 벗고 이제 중년의 아우라를 펼치는 여배우의 사랑스러운 표정도 일품이거니와 영화 속에서 그녀가 선보이는 스타일리시한 의상들은 지금도 슬그머니 감탄을 자아낸다. 어디 그 뿐이랴. 서로 다른 시간과 상황을 절묘하게 연결 짓는 편집은 가히 실험적이라 할만하고, 재치 넘치는 대사들은 청춘남녀의 다정한 밀어가 중년 부부의 권태로 바뀌는 순간을 키득거리며 지켜보게 만든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간 아래 주단처럼 깔려있던 선율들.  


007 시리즈의 타이틀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은 모리스 바인더의 간결한 오프닝 크레딧에 감미로운 음악으로 윤기를 더하는 헨리 맨시니의 메인 테마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하나 둘 스쳐지나가는 도로 표지판 사이로 달리는 자동차. 피아노에서 현악기로, 바이올린으로, 아코디언과 관악기로, 그리고 다시 피아노로 넘어가는 멜랑콜리한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아늑해진 마음은 조안나와 마크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채비가 되어있다. 우연한 만남과 달콤한 연애, 행복한 신혼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애증과 애틋한 화해로 이어지는 그들 사랑의 여정을.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플롯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기에, 맨시니는 <언제나 둘이서>의 음악을 작곡하면서 꽤나 애를 먹었다고 고백했다. 세월을 수시로 뛰어넘는 감정의 보폭이 워낙 커서였다. 가난한 날의 행복과 풍족한 현재의 불행이 교차할 때마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난감해하던 맨시니에게 스탠리 도넌은 '옷이 바뀌는 것처럼, 자동차가 바뀌는 것처럼'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건넸고, 작곡가는 리듬은 변화무쌍하지만 멜로디는  한결같은 테마곡으로 감독을 만족시켰다. 옷이 바뀌어도 입는 사람은 그대로이고, 자동차가 바뀌어도 두 사람이 가는 길이 다르지 않음을 애틋한 선율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생 끝에 작곡한 이 영화의 테마곡 'Two For The Road'에 대해 헨리 맨시니 스스로 베스트로 꼽을 만큼 흡족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개봉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기에 유선 방송을 전전해야 했던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음에도 한 번이라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맨시니의 음악에 매료당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둘이서>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SLCS(1991)

  

재즈의 로맨틱한 향취를 머금은 메인 테마뿐 아니라 몸과 마음을 나른하게 만드는 가벼운 연주곡, 흥겨운 로큰롤과 클래시컬한 왈츠풍의 스코어까지. 허투루 흘려 듣기 아까운 맨시니의 스코어 하나하나에는 선명한 멜로디와 즐거움을 주는 음악으로서의 포만감이 두루 갖춰져 있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은 헨리 맨시니를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어 주긴 했지만, 뛰어난 영화음악가로 그를 평가하는데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했다.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관습은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는 멜로디를 기피했으므로. 그래서 영화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면서 맨시니는 사운드트랙 앨범 제작에 회의적이었고, 그가 만든 대부분의 영화음악들은 이후에 새로이 녹음된 버전이다(<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이 부른 'Moon River'를 사운드트랙에서 들을 수 없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 애초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를 특별 초빙해 런던에서 영화음악을 녹음했음에도,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녹음을 했을 때 그라펠리는 미처 데려오지 못했던 것. 흔히 OST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지만 같은 영화음악이 담긴 앨범이라도 'Original Soundtrack'과 'Music From The Film'이라는 표기 사이에는 더러 그런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실제 영화음악과 재녹음한 버전의 차이에서 오는 아쉬움이 그리 크지 않다. 헨리 맨시니가 작곡과 편곡은 물론 스스로 오케스트라까지 지휘했기 때문이다. 진짜 영화음악은 영화를 통해서만 듣고, 감상을 위한 영화음악은 재녹음을 통해 독립적인 앨범으로 발매했던 맨시니는 그래서 가장 순수한 영화음악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상업적인 작곡가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것은 삽입곡으로 채운 80년대 컴필레이션 사운드트랙의 시대가 도래하기 훨씬 이전에 음악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그리고 (순수한 영화음악이라기보다) 영화의 음악으로서 스코어를 만나게 되는 모종의 계기를 헨리 맨시니가 마련했다는 인상도 준다. 유성 영화가 탄생한 이래 무수한 영화음악들이 만들어졌지만 미처 음반에 실리지 못하고 사라진 것과 달리 맨시니는 자신의(때로는 타인의) 영화음악을 앨범으로 부지런히 발표했던 음악가였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풍부한 디스코그래피를 가졌기에, 그래서 그는 '영화음악의 모차르트'로 불리기도 했다. 아마도 그에게 음악을 만드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은 같은 무게의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를 위해 종종 특별한 멜로디를 선사했던 것 역시 음악의 즐거움을 알았던 맨시니의 소소한 버릇 중 하나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등장하는 고양이를 위해 'Something for Cat'을, <핑크 팬더>에서는 배우 피터 셀러스를 위해 'Something for Sellers'를 작곡했던 맨시니는 이 영화에서 다시 만난 오드리 햅번을 위해 우아한 재즈곡 'Something for Audrey'를 마련했다. 이미 매혹적인 'Moon River'를 그녀에게 선사했지만, 햅번의 이름과 이미지를 오롯이 간직한 이 재즈곡이야말로 그녀에 대한 맨시니의 찬가가 아닐까. 언제나 둘이서 함께 했던 영화 속 월레스 부부의 여정은 화해의 입맞춤으로 끝을 맺는다. 애수 어린 비올라 선율로 따스했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서로의 감정을 다시 확인했을 때 터져나오는 오케스트라 연주.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던 그 은은한 멜로디가 지금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머릿속에 맴도는 것만 같다.




01  [02:39]  Two For The Road(Vocal)

02  [02:57]  Something for Audrey

03  [02:15]  The Lovely Life

04  [02:31]  The Chaser

05  [02:45]  Something Loose

06  [02:46]  Happy Barefoot Boy

07  [02:40]  Two For The Road(Main Title - Instrumental)

08  [03:08]  Congarocka

09  [02:08]  French Provincial

10  [02:42]  The Donk

11  [01:23]  Domain St. Juste(Din-Din Music)

12  [03:12]  Two For The Road(Instrum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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