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적, 1990
뇌염으로 인해 식물인간으로 살아왔던 레너드가 30년 만에 깨어나 자신의 힘으로 걷고, 먹고, 말하게 된 건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세이어 박사의 집념 덕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사는 레너드를 끝내 완치시키지 못한다. 차츰 호전되던 그의 병세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짧은 여름 밤의 꿈처럼 한순간 찾아왔다 이내 사라져버린 1969년의 기적.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라 쓰라린 실패가 된 말콤 세이어 박사의 이야기는 회고록에 담겼고, 페니 마셜 Penny Marshall 감독의 <사랑의 기적 Awakenings>은 소설이 아닌 그 회고록, 즉 실화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래서 홈 드라마의 따스하고 당연한 귀결을 따를 수 없는 이 영화의 새드 엔딩은 퍽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온기가 넘친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유머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페니 마셜의 연출력이 영화 곳곳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빛에 서린 온기를 선율로 전하는 랜디 뉴먼 Randy Newman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음을 휘젓는 힘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황금기는 3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놓여있지만, 우리가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황금기는 오히려 90년대가 아닐까.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스코어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던. 그래서 영화음악 팬들이 국내에도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던. 영화음악이 단지 영화의 여백을 메꾸기 위한 부수적인 장치가 아니라 두고두고 듣는 음악의 한 장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오디오에 올려놓은 사운드트랙에서 흘러나오는 곡에 반해 야심한 밤 홀로 귀를 기울일 때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영화의 한 장면을 그 선율이 복기시킬 때마다 난 영화음악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힘과 매력을 느낀다.
지금껏 수많은 영화음악가의 이름을 거론했지만 아직 한 번도 소개하지 않은 랜디 뉴먼이 작곡한 스코어들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기적>은 뉴먼의 최고작은 아닐지 몰라도 근 20년 간 그의 베스트 5를 꼽아야 할 때마다 빼놓기 어려웠던 앨범이었다. 데뷔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작에 힘쓰기보다 내실 있는 디스코그래피이자 필모그래피를 꾸려온 뉴먼의 스코어는 한결같은 구석이 있다. 가끔 찾는 별미가 아닌 늘 식탁에 오르는 쌀밥처럼 질리지 않는 선율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디스코그래피 자체도 기복이 없지만 작품 하나하나에 수록된 스코어 역시 기복이 별로 없는 그의 무난한 음악은 귀를 홀리는 탄식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안식에 가깝다.
열한 살 소년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정체모를 질병. 짙어가는 병색에 불안해진 동심을 수심 가득한 멜로디로 살피는 'Leonard'도 그런 인상을 준다. 여리디 여린 플루트 음색으로 애달픈 단조의 선율을 시작하면서 현악기의 따스한 배음으로 주선율을 다독이는 이 곡엔 아들의 병석을 지키는 착잡한 어머니의 손길이 아른거린다. 호전될 가망도, 차도도 없는 증세가 몰고 오는 슬픔과 아픔과 공포. 슬로우 템포와 은은한 선율로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뉴먼의 시선은 영화 내내 서두르는 법이 없다.
푸근한 외모 만큼이나 따뜻한 심성을 가진 세이어 박사를 묘사하는 'Dr. Sayer' 역시 마찬가지. 리듬 악기는 배제한 대신 목관과 현악기를 중심으로 구성한 이 소박한 관현악 스코어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인간관계는 서툰 세이어의 숨은 면모를 후반부의 짤막한 피아노 솔로로 슬그머니 들춘다. 'Leonard'가 플루트로 쓸쓸한 온기를 지니게 됐다면, 'Dr. Sayer'의 훈훈한 청량감은 피아노 덕분이다. 얼핏 모순 형용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인물의 테마로 설정된 선율로 전체적인 윤곽을 잡고, 유니크한 음색을 가진 악기 하나를 보태 그 틀을 깨트리지 않으면서 때때로 전혀 다른 온도를 내는 순간이 <사랑의 기적>에는 종종 등장한다. 이것은 랜디 뉴먼의 특성이라기보다 오히려 감독을 맡은 페니 마셜의 영향으로 짐작되는데, 그녀가 연출했던 <빅 Big>에서 하워드 쇼어 Howard Shore에게 어른과 아이의 다른 눈높이를 동시에 아로새긴 미묘한 스코어를 주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의 기적>에서 랜디 뉴먼의 개성이 단연 빛나는 대목은 그 탁월한 묘사력이 아닐까. 선율의 반복과 테마의 변주가 이 영화음악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귀에 밟히는 멜로디가 없는 셈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레너드와 비슷한 처지의 환자 루시를 위한 'Lucy'에서도 그녀를 살펴보는 세이어 박사의 시선을 고스란히 음표로 옮긴 뉴먼의 스코어는 움직일 수 없는 몸에 갇힌 여인의 답답한 마음과 그녀로부터 기적의 실마리를 찾는 세이어의 놀라움을 섬세한 터치로 그려낸다. 네 마디 정도의 짧은 라이트모티브를 중심으로 피아노와 현악기 그리고 하프를 배열한 이 언더스코어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감정에 한치의 오차 없이 밑줄을 긋는다. 자못 흥미롭다. 사실 이런 류의 스코어에서 음악적인 재미나 감흥을 느끼는 것은 꽤 드문 일인데, <사랑의 기적>에서 랜디 뉴먼이 작곡한 대부분의 스코어들은 영화 속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거동할 수 없었던 침묵의 환자들이 치료제를 투여한 후 한밤의 기적처럼 하나 둘 깨어나는 순간을 묘사한 'Awakenings'에서 영화와 음악의 감동은 최고조에 이른다. 허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스코어는 그 믿기지 않는 기적의 순간에도 담백한 멜로디로 전율케 한다. 음악에 의지해 감동을 배가 시킨다는 것이 감독에게도, 작곡가의 눈에도 너무 뻔해 보여서였을까. 의외로 이 영화음악에서 가장 인상적인 스코어는 의식을 회복했음에도 여전히 말이 없는 덱스터가 연주하는 피아노 곡 'Dexter's Tune'이다. 너무 아름다워 자꾸만 돌려 듣고 싶게 만드는 이 곡에 레너드와 폴라가 쓸쓸히 춤을 출 때 우리는 예감한다. 이별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약효는 차츰 사라져가고 있음을. 그러나 그것이 기적의 끝은 아닐 것이다. 세이어 박사가 레너드를 치료했던 것처럼, 레너드 역시 세이어의 마음을 치유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들이 있음을 일깨우고 다시 침묵의 세계로 돌아간 그의 얼굴이 마지막 랜디 뉴먼의 선율 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01 [04:32] Leonard
02 [01:39] Dr. Sayer
03 [03:11] Lucy
04 [01:10] Catch
05 [03:11] Rilke's Panther
06 [03:09] L Dopa
07 [05:43] Awakenings
08 [03:14] Time Of Season_ The Zombies
09 [01:05] Outside
10 [00:50] Escape Attempt
11 [03:29] Ward Five
12 [02:39] Dexter's Tune
13 [02:29] The Reality Of Miracles
14 [06:00] End Ti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