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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분홍 Feb 28. 2019

알아봐 주는 사람

나는 사진을 잘 못 찍는다(고들 한다). 바닷가 노을이 해변 전체를 물들일 듯이 붉게 퍼지는 장관을 찍었는데 수평선이 묘하게 맞지 않는다던가, 인물 사진을 찍으면 정수리 위로 나무가 솟아있는 식이다. 한 번은 언니랑 여행을 가서 서로 번갈아 찍어줬는데, 본인사진을 체크하더니 진지하게 묻는다.



“너 뭘 찍은 거야?”






뭐 나도 할 말은 있다. 전체적인 구도에 개의치 않고 피사체 자체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너도나도 찍는 인스타그램의 감성 사진과는 달리 유니크함이 있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너만의 길을 가라고들 하면서, 왜 사진은 남들처럼 찍으라고 하는 것인가! 



너의 독창성은 몹시 존중하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아 달라는 마음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찍힌 사진 중에, 내가 찍은 것 같은 사진을 본 적이 없긴 하다. 그렇다면 잘 찍어줘야겠다 싶어 인터넷 검색을 했다. 수평선을 못 맞추는 것은 격자무늬 필터를 설정하는 것으로 해결했고,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하지 말고 근접 촬영을 하는 것도 좋다는 조언이 눈에 띄었다. 그래, 이거야!  



마침 후배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갈대숲 호수를 전체 조망할 수 있도록 통유리창이 있는 멋진 장소에, 주문한 음식도 마르게리따 피자와 크림소스가 진하게 버무려진 투움바 파스타였다. 



“나 사진 찍는 연습할 거야. 인터넷에서 가까이서 찍어야 한대”



찰칵찰칵. 피자는 도우가 보이지 않게 토핑이 잔뜩 올려진 중앙 부분을 찍었고, 파스타는 접시에 꽂혀있던 덜어먹는 스푼형 포크를 꼭 나오게 하고 싶었다. 시키지도 않은 숙제 검사를 맡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휴대폰을 내밀었다. 



보자마자 먹고 싶은 걸 보니 잘 찍었구만



그녀는 방금 찍은 사진 외에도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조금 더 훑어보더니 공통점까지 발견해냈다. 


“오, 모든 사진의 지평선이 피사체를 관통하고 있어요! 요기서는 지평선이 정확히 가로등을 이등분하고 있고요, 이 사진도 바다의 수평선이 사람 목을 지나가고 있잖아요. 하하하, 정말 멋진데요? 선배님만의 느낌이 있어요.”



차마 사진은 못올리겠어서 그림으로...



사진 촬영 영역에서 처음 듣는 과분한 칭찬이었다. 문득 몇 달 전에 봤던 리얼리티 예능 하트 시그널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여덟 명의 남녀가 한 집에 살면서 서로의 짝을 찾는 미팅 프로그램인데, 뒤늦게 투입된 여자 출연자가 이미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있는 남자 출연자와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상대가 있어도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관심이 없으면 내가 조건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이 세상에 잘난 사람이 많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나를 알아주는 사람 한 명’이라고 맞장구친다. 나의 노력 여부에 따라 만남이 결정되는 사람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수평선으로 목을 자르는 구도를 예술가적 감각이라 말해주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다.



내 결과물의 퀄리티를 따지기보다는 나의 시선을 따라와 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단순히 칭찬받아서 좋은 수준이 아니다. ‘넌 너만의 관점이 있어!’라니. 아,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한 나머지 스스로를 저평가하고 심지어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조차 의심하는 나를 구해준 것이다. 나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마음은 고유함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된다. 수십 억 인구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수십 억 인구 중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당분간은 이 말에 기대어 내 스타일대로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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