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낯선분홍 Feb 16. 2019

티모시 샬라메가 되고 싶어요

이걸 보는 게 아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찰나,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를 발견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 그냥 부딪혀 버리는 사고 같았다. 한 여름의 사랑 얘기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열병임을 알면서도 무방비 상태로 있었던 내가 한심해졌다. 이 영화의 배경인 이탈리아 북부의 크레마 지역과는 전혀 관련도 없는 동아시아의 작은 동네에서 겨울을 맞고 있는 주제에.






피사체만으로도 아름다운 포스터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지 않았던 것은 긴 이름 때문이었을까? “Call me by your name”이라니. 일본 영화의 번역 제목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와 비슷한 길이지만 확실히 영어 문장으로 된 제목은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극장에서 내려가고도 한참이 지났을 어느 날, 나는 강변북로 위를 달리던 중이었다. 꽂아놓은 CD는 그날의 기분에 어울리지 않았다. 옆자리에 놓인 다른 CD로 교체하기에는 난 아직도 핸들을 양손으로 쥐는 초보운전자. 그나마 만만한 기술인 라디오 켜기를 하자,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내용을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Summer in Italy / 출처: 티모시샬라메 인스타그램



1980년대 북부 이탈리아가 배경인 이 영화는 17세 소년인 엘리오와 교수인 엘리오 아버지를 돕기 위해 그의 집에 6주간 머무르는 24살의 대학원생 올리버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이다. 2007년에 발간된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 “그 해, 여름 손님”이 영화화된 것으로 스토리와 영상미, OST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제90회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각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라디오에서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엘리오와 그 소리에 이끌리는 올리버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강렬한 감정의 교류가 이 영화를 꼭 봐야 할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결국 상대를 서로의 이름으로 부르며 깊은 관계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은 것은 10대 소년의 불안정한 마음 그 자체였던 엘리오였다. 일분일초마다 변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지만 그것이 변덕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십 대라면 마땅히 저럴 수 있다는 당위성마저 느껴졌다. 도대체 이 미친 연기를 하는 배우는 누구란 말인가! 다행히 나보다 먼저 그를 알아본 분들 덕에 인터넷에는 그의 영상과 자료가 차고 넘쳤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예 배우, 티모시 샬라메. 인상적인 것은 함께 작업한 감독과 동료들의 그를 향한 평가였다. 하나같이 그의 영리함과 연기에 대한 진지함, 인간적인 순수함을 찬양했다. 최근 마약중독에 빠진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뷰티풀 보이”에서 그의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스티브 커렐은 티모시를 “품위 있는 영혼(gracious soul)”이라 평했다. 자신의 업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같은 또래인 밀레니얼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하려는 그의 태도를 극찬하는 대목이었다. 실제로 그는 “현실을 투영하는 배우라는 직업이기에 젊은 세대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라는 말을 했는데, 그 인터뷰 밑에 달린 댓글이 눈을 끌었다.


'정말 멋있네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 배우들이 있다면 좋을 텐데.'


무슨 의미인지는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마냥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하도록 기대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싶었다. 과연 이 시대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할까? 끊임없이 현재를 살펴보고 성장하며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발전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기에 더욱 그에게 끌리는 것이리라.


나는 티모시 샬라메 같은 사람들의 삶이 몹시도 궁금하다.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영향을 주고받는지, 단단한 자존감의 뿌리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말이다. 가지고 있던 씨앗을 열매로 맺어내기까지의 세세한 과정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싶다. 만약 내 앞에 요정 지니가 나타나 요술램프를 건네며 지금까지의 나와 새로운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말할 것이다. 


“티모시 샬라메가 되고 싶어요!” 


그와 나는 성별도 인종도 국적도 전혀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잘 때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는 점뿐. 완벽하게 다르기에 고스란히 그가 되어보고 싶다. 너의 이름으로 내가 불리는 대신 온전히 그가 되어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낄 것이다. 10대 시절에 인생의 방향을 정해 확고히 밀고 나갈 것이며, 그렇기에 겪는 좌절과 기쁨도 온전히 내 것으로 누리리라. 가족들의 열렬한 지지와 사랑을 듬뿍 받고,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대할 것이다. 또한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책임감 있는 목소리를 내며 뜨겁게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강렬한 열망, 갖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이라도 꿔본다. 동경하는 그의 모습처럼 나도 죽을 때까지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내 우주가 확장되어 우리의 공통분모가 넓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때까지 내 마음속 요정 지니가 요술램프를 켜고 끊임없이 응원해 주기를 기대하며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양장피의 맛: 추모파티에서 이 편지를 낭송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