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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분홍 Feb 14. 2019

양장피의 맛: 추모파티에서 이 편지를 낭송합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호호, 사실은 이 편지를 조금 더 일찍 쓰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큰딸인 수정이가 49재 추모 파티 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써서 읽어달라고 했거든요. 세상에, 추모 파티라니. 너무 어머니 딸답죠? 제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왠지 고인을 기리는 것은 엄숙해야 할 것 같잖아요.



“난 가족들이랑 친척들 모여서 진지하게 슬퍼하고 싶지 않아. 엄마처럼 유쾌하고 즐겁게 추억을 나누는 자리였으면 좋겠어.”



그 부탁을 받고 너무 기뻤어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정말 화석처럼 강렬하게 저장된 어머니의 기억이 몇 개 있거든요. 아쉽게도 몇 가지 이유로 추모 파티는 무기한 연기되었어요. 심지어 전 그 날 입고 갈 한복 드레스도 골라 놓았는데 말이에요. 그 이후로 전 마음 속으로 가끔 편지를 쓰곤 했어요. 들어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저희의 첫 만남은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신도시에 생긴 학교라 개교 첫 해는 모두 전학생이라는 특수성이 있어서 어색해 하면서도 쉽게 친해졌던 것 같아요. 기존에 살던 지역도 성격도 모두 다른 아이들이 섞여 있는 틈에서 수정이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어릴 때는 다수의 아이들이 하고 있는 일에 같이 휩쓸리는 군중심리 같은 게 있는데, 수정이는 원하지 않는 일은 단호하게 “난 안 할래”라며 집에 가고는 했어요. 뭔가 어려운 말도 막 했던 거 같은데 알고보니 전학오기 전에 전교 1등도 했다더라고요? 저희는 서로 좋아하는 책과 음악을 공유하면서 가까워졌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집에 놀러 오라고 하더군요. 학교 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는데, 딸 친구가 왔다며 어머니는 방에 음식을 가져다 주셨어요. 메뉴는 무려 양장피!


평범한 간식이 양장피라고?? / 출처: 위키백과



평소에도 잘 먹지 못하는 요리인데 이걸 집에서 만들 수 있다니.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에겐 큰 충격이었죠. 더 놀라운 건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이에요. 그 뒤를 이어 깐풍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요리들, 과일, 디저트가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신 음식인데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먹고 먹고 또 먹었어요. 요즘이었다면 유튜브에 푸드파이터 영상으로 업로드도 가능할 정도였어요. 생각해보니 주는 대로 접시를 비워대니 음식이 부족한가 싶어 계속 만드셨을 수도 있었겠네요. 혹시라도 그러셨다면 늦었지만 죄송했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사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수정이의 반응이었어요. 세 시간의 릴레이 식사 끝에 항복을 선언한 저에게 “우리 엄마 원래 이래” 라니요! 심지어 '이거 맛있다고 하면 한달 내내 같은 음식 먹으니까 맛있다고는 잘 하지 않는다'니. 와 이게 가진 자의 여유로구나 싶었어요. 어머니의 필살기는 아귀찜인데 이웃들의 열렬한 성화에 한 달 내내 아귀찜을 만들어 이 집 저 집 가져다 주시기도 했다는 얘기도 덧붙였어요. 그 때 이후로 전 생각했죠. “무조건 친하게 지내야겠다” 그러다 보니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는데, 우리 우정의 시발점이 어머니였네요.



참, 저희 지산 밸리락페스티벌 같이 간 것 기억나세요? 임신한 딸이 1박 2일로 락페스티벌을 가고 싶다고 하니 혹시나 몸 상할까 직접 차로 데려다 주셨죠. 저희를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이 심심하다고 조수석에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온 것도 참 어머니답다 싶었어요. 3대, 아니 뱃속의 아이까지 4대가 함께 하는 길에 저와 언니를 같이 태워주신 것도 감사했어요. 그러다 어머니는 수정이가 출장 다녀와서 선물로 과자를 사왔다며 흉을 보셨고, 수정이는 여행이 아니라 출장인데 선물을 챙기기는 어렵다며 엄마 선물사면 할머니, 이모들까지 챙겨야 하니 형편이 안 된다며 항변했어요. 그 때였나요, 차가 휘청했던 것이?


“아, 엄마, 제발! 운전할 땐 앞만 보라고!”


“응 알았어, 알았어”


“아니 운전할 때 다른 데를 보면 어떡해”


전 출장 다녀올 때 선물은 무엇이 좋은지, 둘 중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아니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게 맞는지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싸움이라니요. 하지만 이런 고민이 허무하게도 화제는 금방 전환되었고 페스티벌 현장에 도착해서는 웃으면서 내릴 수 있었어요.



수정이가 출산 한 뒤에 집으로 놀러 가면 종종 어머니가 있었어요. “아니, 애는 지가 낳고 왜 나한테 봐달라고 그래” 라는 볼멘 소리를 하셨지만, 저녁에 들어가시면서 혹여 딸이 힘들까 싶어 세탁소에 맡길 옷가지들을 챙겨 가시던 뒷모습이 눈에 선해요. 그렇게 보살피신 덕분에 첫 손녀 윤서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해요. 제 엄마 닮아서 어린데도 얼마나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지 몰라요.


“야, 내가 차에 윤서 태우고 가다가 차선 변경하면서 잠깐 헤맸거든. 그랬더니 윤서가 뭐라는 지 알아? '엄마 운전할 때 잘 봐야지' 라는 거야. 참 내”


“그거 진짜 너랑 똑같네. 기억 안나? 우리 지산 락페스티벌 갈 때 네가 엄마한테 앞에 잘 보라고 막 뭐라 했잖아”


“아 그랬냐, 나 진짜 웃긴다 깔깔깔”


그러다 문득 수정이가 물어봤어요. “내가 그 때 엄마한테 너무 심하게 얘기한 건 아니었지?”


솔직히 전 그 당시에 티격태격하던 모녀가 부럽기도 했어요. 전 부모님과 그렇게 격의 없는 대화를 한 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전해들은 어머니 얘기는 전부 시트콤에 나올법한 내용이었어요. 예를 들면,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먹튀한 유저를 끝까지 쫓아가서 결국 사과를 받았다거나 도로에서 다른 운전자와 싸움이 나서 경찰서 유치장에 잠시 계셨던 얘기들이요. 오죽하면 수정이 결혼을 서두르신 이유도 유쾌했어요. “얘, 결혼은 무조건 예쁠 때 해야 돼. 신부가 아니라 신부 어머니가”







실제로 어머니의 유쾌함은 병원에서도 빛을 바래지 않았어요.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신 경우에도 병문안을 가면 늘 농담을 하셨기에 늘 그렇듯이 급한 고비를 넘어 오래오래 계실 것만 같았죠. 어머니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누워계셨을 때도 “아유 하루 종일 누워있으니 허리 아프다”며 곧 눈을 뜨실 것 같았어요. 아마 두 딸들이 어머니의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세수와 목욕을 정성스럽게 해드린 덕이기도 하겠죠. 그러고 보니 전 아직 납골당에도 한번 안 다녀왔네요. 언제 한 번 같이 가자고 하니 수정이는 “아, 엄마 뼈 있는데? 그래, 나중에 시간되면 같이 가자”라고 했어요. 굳이 그 장소에 가지 않아도 엄마는 늘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말투였어요.


제목: 울엄마 / 출처: 수정님


이런 얘길 하면 누군가는 너희 엄마한테 잘 하라고 해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런 식이면 전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잘 할 수 없을 걸요? 아, 쓰다 보니 이럴 때 어머니라면 어떻게 말씀해주셨을까 궁금하네요. 왠지 슬쩍 찾아가서 인생에 하등 도움 안되지만 웃긴 얘기를 죽 늘어놓으면서 낄낄대다 돌아오고 싶어져요. 아무래도 조만간 수정이를 만나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누고, 그녀가 미처 못 들려준 어머니 얘기를 들으면서 겨울을 보내야겠어요. 그 날 메뉴는 양장피,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고량주 한 잔 곁들이면서요.



*이 글의 제목은 수정님께서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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