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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분홍 Jan 10. 2019

남자 친구가 없어도 털은 뽑고 싶어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여주인공 네 명이 여름휴가를 갔을 때의 일이다. 늘 화끈한 사랑을 추구하는 사만다는 친구 미란다의 수영복 밖으로 삐져나온 털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말한다.



 "세상에, 그 수북한 털이라니! 남자가 그곳을 찾아갈 수나 있겠니??"



미란다 언니 표정이 다했음



 그 장면을 본 지 족히 15년이 지났을 지금, 2018년, 사만다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물론 그곳을 찾아올 남자는 (아직) 없지만 말이다.


 제모가 처음은 아니다. 중학생 시절, 교복 치마 사이로 시커멓게 드러나는 다리가 싫어서 눈썹 칼로 무작정 밀었던 것을 시작으로 여성 면도기와 털을 녹이는 크림은 기본이고 한창 출시되기 시작한 왁싱 테이프까지 차례대로 시도한 뒤, 털을 금색으로 염색하면 잘 안 보인다는 얘기를 듣고 털 위장술까지 섭렵했었다. 물론 털 위장술은 금발의 털을 가진 동양인처럼 보여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드디어 숙원사업이던 레이저 제모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종아리는 무릎과 발목 사이라는 것을. 무릎과 발등, 발가락은 추가금액이 있었고 한정된 예산 탓에 제일 시급한 종아리만 시술했는데 이왕 제모를 할 거면 무리를 해서라도 원하는 부위를 모두 한 번에 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어차피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외에 추가로 하고 싶은 곳이 생기기 마련이고, 보통 3~4주 주기로 최대 10회까지 시술이 필요한 부위도 있기 때문에 자칫 하다가는 몇 년을 털을 없애는 데 보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제모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왠지 망설여지는 그곳!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보고 싶다고 몇몇에게 얘기를 했을 때 반응은 한결같았다.


 "왜?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내가 보잖아."


 "....."


 요즘 많이들 한다는데 주변에 실제로 했다는 사람은 없고, 목욕탕에서 간혹 보이는 분들을 붙잡고 물어볼 수는 없는 터. 인터넷 검색을 하니 여러 광고들이 보였고, 위생상의 목적이 크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래, 이제 내 명분은 너다!!


 여러 업체들 중, 뉴욕에서 오셨다는 경력 8년 차 원장님이 계신 곳으로 예약을 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는데, 대기실에는 시술 중인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듯한 20대 남성이 있었고 왠지 모를 어색함에 휴대폰을 만지며 순서를 기다렸다. 십여분 뒤 제공해준 치마를 입고 샤워실이 딸린 작은 방에 누웠다. 천장을 보니 "걱정 마세요, 이 시간도 곧 지나갑니다"라는 문구가 쓰여있었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사만다 언니, 도와줘요!!


 사만다 언니와 살짝 닮은 듯한 원장님이 곧이어 들어오셨고,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저 처음이에요"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괜찮다며 요가의 고양이 자세를 취하게 하더니 곧바로 시술에 들어갔다. 따뜻하게 데워진 왁스가 살짝 발라지는가 싶더니 도톰한 천이 살포시 얹어졌고, "자, 갈게요!"라는 말과 동시에 원장님의 손은 잽싸게 천을 떼어냈고 같은 동작을 두세 번 반복했다. 다음 포즈는 앞을 보고 누워있는 개구리였는데, 귀여운 곰인형을 품에 안겨주었다. 처음부터 고양이 자세를 취해서인지 의지할 곰인형이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포즈는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취해졌고 우리는 날씨 얘기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맛집 공유까지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털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앞쪽도 동일한 방법으로 따뜻한 왁스-> 천 접붙임-> 자, 갈게요! 의 순서였는데, 전문용어로 인그로운 헤어(피부에 살짝 파묻힌 털)를 족집게로 뽑아내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촤악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털이 뽑혀나갈 때, 천장 위에 붙어있던 문구대로 정말 고통은 순간적으로 지나갔지만 이왕이면 모낭까지 뽑혀나가서 더 이상 털이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고통을 잘 참는다며 격려해주며 차가운 마사지 도구로 피부를 달래주었고, 보습제를 발라주는 것으로 시술은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3~4일 지나면 뽀송뽀송한 느낌에 익숙해지고 생리기간에 만족도가 극대화된다고 한다. 실제 만족도는 여자보다 남자가 더 높은 편인데 이유는 항문의 털을 제거하면 볼일 본 뒤 화장지에 묻어 나오는 것이 없어서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에 아홉은 고통을 참지 못해 두 번째 시술을 포기하고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란다.


 그 이후 다른 숍을 두 군데 더 방문했다. 한 곳은 개구리 다리 밑에 쿠션을 끼워 넣어 왁싱을 마친 뒤 거즈를 깔고 20분 정도 미백 팩을 얹어주었지만 시술할 때마다 "따끔해요"라고 말하는 통에 실제보다 더 아프게 느껴져서 재방문하지 않았다. 다른 한 곳은 피부에 자극이 된다는 이유로 왁스로 제거되지 않은 털은 굳이 족집게로 뽑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아파도 깔끔하게 제거하는 쪽이 내 취향이었다. 시술자에 따라 스타일과 고통의 강도가 다르고 시설과 금액도 다르니 미용실이나 네일숍처럼 몇 군데 다녀보면 자신에게 맞는 곳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숍에서 공통적으로 얘기했던 주의사항은 사용하는 제품이 천연 왁스이며 노 더블딥(왁스에 담근 스틱을 재사용하지 않는 것) 시술인지, 일회용 시트와 장갑을 사용하는지 미리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민감한 부위이니 위생에 신경 쓰지 않으면 감염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털이 너무 짧으면 왁싱이 잘 안되니 오기 직전 면도는 금물이며 면도를 했다면 1주일 뒤에 예약을 잡으라고 했다. 털이 자라나면서 피부에 갇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질 제거는 주 2회 정도 꼭 하고 순한 보습제를 매일 발라줘야 한다. 주기는 6~8주가 적당하며 왁싱 직후에 2~3일은 사우나와 수영장 등을 피하는 것이 좋다.


 아이고, 저렇게까지 하면서 왁싱을 해야 되나 싶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을 듯! 심지어 첫 시술을 마친 뒤 주변 친구들을 입문시키려고 노력하게 되고, 시술자끼리는 묘한 동지의식이 생긴다. 고수들은 하트나 별 등의 무늬로 디자인도 한다니 취향껏 레벨업을 할 수도 있겠다. 마친 뒤의 느낌을 누군가는 신생아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하는데, 일단 보기 싫었던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제일 기쁘다. 그곳을 찾아올 남자는 (아직) 없어도 우선 내 취향은 내가 존중해 주면서 지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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