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같은 거래
- 왜?
- 25일(살)이 지나면 쓸모없으니까
스물넷. 지금 생각하면 어리다 못해 분유 냄새가 날 것 같은 아리따운 나이에 동기 남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30대 후반이 훌쩍 넘은 지금 그런 얘길 들었다면 '야 이놈아, 너랑 나랑 동갑이야'하며 당장 쏘아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그런가 싶고 이제 내 인생 늙을 날만 남은 것 같아 한동안 치킨도 안 먹을 정도로 우울했더랬다.
딱 십 년 뒤 서른다섯에 소개팅에서 만난 마흔넷의 남자는 태국식 파인애플 볶음밥을 쩝쩝대면서 "요즘 여자들은 직장 생활하면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니 자기 나이 많은 것은 생각도 안 하고 눈만 높아져서 비슷한 또래나 연하를 만나려고 한다"라고 했다. 그럼 남자는 어떤가요, 했더니 남자는 나이가 많아지면 경제력을 갖추게 되니 괜찮단다. 직전에 퇴사한 회사 얘기를 하며 앞으로는 돈 버는 일에 목숨 걸지 않고 꿈을 좇을 거야,라고 결심했다던 사람 입에서 나올 얘기는 아닌 듯했다. 흠.. 그렇다면 아홉 살이나 어린 나를 만나러 나온 당신은 돈이 많아야 하잖아!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주선자였던 친구 동생 얼굴이 떠올라 속으로만 삼켰던 적도 있다.
작가 박완서에게는 '나이 마흔에 등단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꼭 따라붙는다. 마치 굉장히 지난한 세월을 지나 늦깎이 도전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느낌인데, 딱 지금 내 나이다. 심지어 그녀처럼 남편도 아이도 없으니 어째야 하는 것일까. TV 프로그램도 사정은 비슷한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노처녀라고 생각되는 나이대가 점점 올라간다는 것일 뿐. 2005년에 50%가 넘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나이 많고 짝도 없고 심지어 통통한 몸매로 묘사되었던 주인공 김삼순의 극 중 나이는 서른이었다. 서른, 잔치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나이인데 말이다. 2012년작인 드라마 '신사의 품격'의 남자 주인공들이 40대 초반인데 반해 여자 주인공은 30대 중반이고, 심지어 주인공들이 고등학생일 때 태어났던 열일곱 살 연하의 아가씨의 일방적인 구애를 받기도 한다. 남자 주인공들의 나이에 비해 여자 주인공 나이는 서서히 움직인다.
어릴 때 꿈꾸던 마흔의 삶은 미국판 'Sex and the City'처럼 자신의 커리어도 있고 안정적인 수입에 널찍한 집을 소유한 성공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골드미스 아닌 그냥 미스인 채로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버렸다. 아직도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나름 안정적이라 생각하며 10년을 근무한 회사는 다음 스텝을 정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아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험으로 체득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스킬로 마인드 컨트롤도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나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미혼여성이지 않은가!
Olive TV에서 방영 중인 '밥블레스유'는 언니들이 고민을 들어주며 그에 맞는 음식을 추천해주는 형식으로 방송인 송은이 씨가 기획을 맡은 것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녀는 시어머니도 아이도 없는 중년 미혼여성은 TV 프로그램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느끼고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동료인 김숙 씨와 함께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진행하며 VIVO TV를 만들었고 유튜브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났다. 셀럽파이브라는 여성 그룹을 결성해 걸그룹과는 상반된 개성 있는 춤으로 인기를 끌면서 판을 키워냈고 프로그램 기획까지 하면서 판키우는 계속 진행 중이다.
나도 내가 설 자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처럼 그동안 직업으로 삼으면 어떨지 궁금했던 일들을 차례대로 진행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피곤했던 탓에 디톡스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디톡스 주스와 생채식요리 자격증을 따기도 했고 가죽공예 수업을 들으며 하루 종일 앉아서 뭔가를 만드는 것이 적성에 맞는지 테스트를 해보았다. 나와 같이 제2의 직업을 찾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각 사람의 고유한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워크 디자인 과정을 수료하고, 기획과 트렌드를 공부하러 일본 투어를 가기도 했다. 크리에이터를 꿈꾸며 글쓰기와 인스타툰 그리기를 배우면서 마음 맞는 동료와 실제로 사업계획을 짜면서 공유 오피스에 입주하기도 했다.
내 자리 만들기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하나씩 시도해보는 과정이 사랑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15년 전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케이크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365일 맛있으니 걱정 말고 맘껏 즐기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