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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May 04. 2020

객관적으로 살아보기

글을 써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내가 쓰는 글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객관적으로 살아보자”라는 것이었다. 혹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내가 쓴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낼 기회가 생긴다면 책의 제목은 이미 정해놓았다. “객관적으로 살아보기”로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비슷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똑같은 사람은 단 1명도 없다. 우리나라에만 해도 5,000만 가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각자의 경험과 각자의 느낌과 각자의 생활방식을 통해 인격이 만들어지고 생각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이에 따라 외모도 변화해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어떻게든 나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다르다는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단언컨대 달라서 좋은 경우보다는 달라서 나쁜 경우가 훨씬 많다. 달라서 다툼이 일어나고 달라서 갈등이 발생한다. 간혹 다르다는 것은 다채롭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감탄하는 경우도 있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는 과정 중에서 생기는 다양한 결과물들로 풍성한 성과가 나는 경우도 분명 있다. 그러나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오래가고, 웃었던 일보다는 울었던 일이 더 마음에 깊이 새겨지듯이 달라서 좋았던 경험보다는 달라서 안 좋았던 경험이 더 깊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기 마련이다.


틀리다는 건 아니다. 살아가는 데 정답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뿐이다. 혹여 틀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생각이 틀린 것이리라. 선악이 없고, 정답과 오답이 있지도 않다. 다만 같지 않다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달라서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을 해결해야 하나. 갈등 자체가 안 생기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다마는, 다른 걸 어떡하나. 같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같아야 하는데, 같을 수가 없는데 어떡하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나의 관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가”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의 주체는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의 주체가 “내가” 될 순 없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맞춘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맞춘다는 것은 다름을 온전히 받아들여 내가 변화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른다는 것인데, 이해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맞추기까지 할 수 있겠는가.


이해할 수도 없고 같아질 수도 없으며 맞출 수도 없다. 그런데, 다르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인정해 볼 수 있겠고,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고 생각해보는 일은 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만드는 어마어마한 일까지는 하지 않아도 좋고 할 수도 없다. 단지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서 잠시 잠깐이나마 들어보고 생각해보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물론 그것만으로 큰 변화가 생길지 사실 자신은 없다. 그런데 한번 해 봄직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은 든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나의 견문을 넓혀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생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듦으로써 나의 생각과 비교하여 좀 더 나은 방향을 결정짓는 참고자료가 될 수도 있다. 뭐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갈등과 분쟁을 조금은 뒤로 미루는 효과는 낼 수 있다.


올해부터 글을 쓰면서 나에게 들려지는 여러 가지 피드백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공감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더욱 감사하게도 나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얘기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그럴 자신도 없다. 내 생각이 맞으니 내 글을 읽으신 분들은 내 생각대로 살아줬으면 좋겠다라는 허황된 꿈도 꾸지 않는다.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저런 상황에서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잠시라도 느꼈다면 내 글쓰기의 목적은 완수한 것이다. 내 글을 읽은 사람이 조금이나마 다른 생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면, 내가 지향하는 “객관적으로 살아보기”에 동참해준 것이 되겠다.


내가 느끼는 “객관적”이라는 말은 내 생각은 일체 배제한 체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비록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만 고집하지 않은 체 나의 생각을 바탕으로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들어보고 잠시 잠깐이나마 느껴보려는 노력을 해보려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은 어렵다. 완벽한 “객관적”이란 상태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내 생각을 조금만 접어두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 기울여보려는 노력. 그게 “객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으로 살아보려는 노력”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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