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서 15년을 보냈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교직을 떠나온 지금까지도 돌아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초임 때 학부모로부터 받았던 모멸감을 잊을 수 없다. 정현이.. 의 형은 경찰이었다. 그 녀석이 다른 급우를 때려서 코 뼈가 부러졌는데 담임인 나를 다구쳤다. 담임은 뭐 했냐고! 학급인원 60명이 넘던 시절 게다가 중 2 남학생들의 쉬는 시간까지 담임이 책임을 져야 하는지.. 당시 초임 발령 교사,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정현이 형과 엄마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늘 든든해 보이셨던 학생 주임선생님은 스스로 해결하라고..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우고는 자리를 떠나셨다. 그 일이 어떻게 결론 지어졌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너무너무 공포스러웠고 꽉 다문 입이 흔들려 떨리던 것, 그리고 흐르던 눈물, 죄송합니다.. 를 반복하던 고양이 앞의 쥐새끼마냥 덜덜 떨던 내 모습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15년을 아이들과 지내면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고 어느 정도 베테랑이 되어 문제가 있는 아이들 학부모들과의 면담도 능숙하게 대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미국에 와서 다시 초떼기 한국학교 교사가 되었다. 토요일 3시간 수업에 불과한, 교사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한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경력이 얼만데! 하는 맘이라 자신감이 넘쳤었다.
그런데 어쩌면 15년 전 그때와 똑같은 일이 생기고 나는 또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또 덜덜 떨어야 했다. 기가 막히게도!
연두는 3학년이다. 말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소리 지르고 책상사이를 뛰어다니다 못해 책상 위까지 올라갈 정도. 암튼 그 정도가 정상을 넘어선 아이다.
숙제도 안 해오니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그냥 한국학교에 놀러 온 거라 보면 된다.
수업 진행이 어려웠고 다른 아이들에게 까지 전염되어 더 이상 인내심이 바닥이 난 어느 날 나는 극단의 조처를 취했다. 뭐 당시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체벌.
교회 마당에 나가서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주어 와서 책상을 치고 앞으론 이 나무 가지로 때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뭔가 두려웠던지 조금 분위기가 잡히는듯했는데.
다시 토요일이 왔고 30분 일찍 나가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연두 어머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화가 난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이라고 하던가? 딱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시더니 감히 니 따위가 뭔데 내 아이를 때린다고 해서 아이가 무섭다고 학교를 안 간다 하게 만드느냐! 다짜고짜 큰 소리를 치는데 15년 전 그때의 악몽이 그대로 전해 지는듯하고 미국 문화가 아직 어떠한지 모르는 나는 또 덜덜 떨었다.
아니요! 때리지 않았어요. 하두 떠들어서 엄포만 놓은거예요..
라고 했지만 그분은 그 조차도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교사 노릇 제대로 하라고 호통을 치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게 뭐야?
물론 체벌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토록 말 안 듣는 아이 한번 가르쳐 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간신히 수업을 마치고 교사회의에 들어갔는데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었다.
절대 체벌은 안된다! 가 요지였다.
나 때문이었다. 물론 교장선생님은 나를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회의가 끝나고 교장선생님에게 가서 이실직고를 했다. 나 때문에 학교에 문란을 일으켜 죄송하다고. 몰라서 그런 건 줄은 알지만 담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라는 말을 듣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이게 뭐야...!
금쪽같은 토요일 3시간이나 그 말도 안 되는 개구장이들을 데리고 겨우 20불 받고 일하면서 이런 꼴이나 당하고.. 생각하다 보니 처량하고 억울하고 신세가 비참했다.
한국의 체벌 문화는 교사인 내가 봐도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남교사들이 군대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군사문화가 들어와서 원산폭격이니 하는 정말 심한 벌로 아이들을 훈육하는 모습은 훈육이 아닌 고문에 준하는 모습이라 나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체벌로 인한 항의는 거의 없던 시절이었고 아이들 엄포용으로 대부분의 교사들은 지휘봉 겸 손바닥 정도 때릴 수 있는 막대기 하나 정도들은 다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 문화에 있다가 나뭇가지 하나 들고 엄포를 놓았다고 이리저리 수모를 당하고 나니 한국학교에 정이 똑 떨어져 버렸다.
난 돌아가면 철밥통 공립학교 교산데 뭐 하러 여기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모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나! 때려치우자! 그깟 20불? 하이고 한국 가면 그깟 거 돈도 아니야! 하면서 그만두기로 했는데..
내 아이들은? 한국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아이들만? 그냥 집에서 가르칠까?
미국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느라 한국학교 만 가면 물 만난 고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생기발랄해지는 아이들을 집에서 끼고 어떻게? 하는 생각에 이르자 그냥 참고 다니자... 하는 맘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사건이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40대도 되지 않은 나이였고 한인사회를 조금은 업수이 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던 터라 더욱...
나중에 공부를 마치고 그 지역의 교민이 된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연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단다. 여덟 달 만에 테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자랐고 당시 그 비용이 밀리언을 넘었다는. 당시 연두아빠가 코카콜라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다행히 그 비용은 보험회사가 해결했지만 교민사회에서는 유명했던 일이라고.
그래서 연두 어머님의 그 상식이하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상식을 장착하고 대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암튼 지금은 한국도 미국처럼 체벌이 없어진 걸로 안다. 미국은 애초에 체벌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르고 존경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아마도 학교가 입시 스트레스가 없고 또 커리큘럼 자체가 저학년에서는 놀이 중심으로 재미있게 진행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학교가 가정에서 차일드 어뷰즈가 있는지 더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다. 총기사고만 없다면 미국학교는 참 아름다운 곳일 텐데.. 세상엔 완전한 모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거쯤은 이제는 안다. 그러니 선택하는 수밖에!
입시 스트레스냐? 학교 총기사건이냐? 말해놓고 나니 선택지는 분명한 듯 보이나 학교 총기사건이 매일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아이들을 서서히 죽이느냐? 아니면...아이고...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아쉬울 뿐이다.
암튼 각자가 알아서...해야할 문제이니 더이상 갑론을박 하고싶지도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거리이리라.
암튼 나는 그때 한국학교 교사를 그만두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28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학교 교사로 봉직 중이다!
이제는 뭘 가르치려는 수고보다..물론 가르치긴 하지만..아이들이 이방 나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도록 다정한 친구가 되려고 애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