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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hee Jul 06. 2024

무지몽매했던 그 때의 나를 질책한다.

어릴 때부터 겁쟁이라고 불리어졌었다.
부정할 수도 없이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별칭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접할 땐 두려움이 먼저 들러붙어서 한 발도 내디디지 못하는 성격 이었다.
그래서
요즘같이 첨단 기기가 날마다 등장하는 때에 사는것이 나에겐 곤혹이다.

그런 내가 미국이라는 생소한 나라에 접 붙이고 살고있음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대충 집안 일 정도야 그리 다를 것이 없으니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갔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날마다 묻혀오는 미국 문화는  나에겐 늘 풀기힘든 수학문제 같았다.

외화를 즐겨 보아 그 안에서 얼핏 얼핏 보여진 미국이란 나라의 문화를 접한 것이 다인 나에게 파자마 파티니 펀드 레이징 등을 고지하는 가정 통신문은 내가 아는 영어이긴 한데 외계어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어찌 어찌 넘어갈 수 있었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짜릿함도 맛보고 하나하나 해결할 때마다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지만
단 한가지 넘지 못할 일처럼 여겨졌던 건
할동량과 호기심이 과도했던 둘째가 들고오는 미국과 직접 대면하는 일이었다.
워낙 천방지축이라 혹시나 했던지 ADHD 테스트를 받아 보라던  널서리( 유치원가기전에 보내는 놀이방 정도?) 선생님의 권유가 있어서 테스트를 받았지만 정상으로 나와서 크게 문제가 되지않았고
널서리 선생님이 ' 영민이는 총명해서 늘 바운더리를 체크 한다' 는 이야기는 그런대로 넘겨 들었는데
그런 아이의 성향이 몇번의 사고를 일으키자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널서리 졸업을 하고 유치원 가기 전 여름 방학에 영어를 더 익히게 하고자 썸머 스쿨에 등록을 시켰다.

그리고
다닌지 몇일이 되지않아
학교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아이가 같은 반 아이를 때려서 코피를 흘리게 했으니 집으로 데려가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공부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헐레벌떡 달려가자
풀죽은 둘째가 교장실앞에 앉아 있었다.
다행이 상대방 아이는 별 이상이 없다고 부모님이 괜찮다 하며 데려갔고 우린 연신 미안하다! 를 반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몇일 뒤...
이젠 그냥 하루 근신이 아니라 아예 여름학교 퇴학을 당했다.
학교복도에 있는 화재 경보기 줄을 댕겨서 모두가 대피하는 소동을 일으켰고 소방차까지 달려왔다는... 뭐 할 말이 없었다.

친한 친구는 차라리 항변을 허지 그랬냐고..
아이 키가 닿을만한 곳에 줄이 있으니 아이가 당길 수 밖에 없지 않냐고!..학교 책임이라고.
허허 웃을 수 밖에.

다행이 내가 다니게 될 학교땜에 이사를 가야해서 다른 스쿨 디스트릭에 등록을 하게 되어 다시 얼굴을 보는 황당함은 피할 수 있었지만 또 무슨 일을 저지 를지 지뢰를 하나 안고 있는듯 불안했다.
거기에 옆집 할머니가 기름을 부으셨다.
' 영민엄마! 영민이 그러다 깡패학교로 쫓겨나. 어릴 때 확 잡아야해. 두들겨 패서라도 고쳐야해. 안그럼 후회한다!"

할머니는 미국이민 20년으로 미국을 나보다 잘 아시는 분이라 여겼고 그 말에 이성을 잃고 있던 나도  팽 돌아버렸다.

유치원 입학전 아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둘째를 거실 카펫 바닥에 엎으려 놓고 팼다...
지금도 눈물이 난다.
무식한, 겁쟁이 엄마의 무지몽매했던 행이었다.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면 나는 붙들려 갔었고 아이와 격리되었을 것이다.
그땐 차일드 어뷰즈( 아동학대) 라는게 뭔지도 몰랐다.

허벅지에 피가 맺히도록 두들겨 팼다.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선생님이 하라는 것만 하라고.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근데 그땐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내 안에 피눈물이 맺혔다. 아이의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게 아이를 살리는 길이라고 여겼다.
나는 한국에서 교사였다. 학생들을 체벌 하는 걸 누구보다 멸시하던 나였다.
어떻게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려하는가! 인격은 어디 개나 줘버렸나! 하던 내가 한국학교에서 체벌로 징계 먹은지 얼마되지않아 이젠 내 아이에게 몽둥이 찜질을..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아이를 바르게 양육한다는 미명하에...

둘째는 그 날 이후
달라졌다.
말 안들으면 몽둥이의 "몽" 자만 말해도 싹싹 빌고 치맛자락을 붙들고 떨어지지않았다.
성공? 이었을까?

겁쟁이 엄마처럼
아이도 겁쟁이가 되고 말았다.

아이의 창의력과 독창성을 살려주는 부모가 되는 길은 어렵다. 그 길을 찾는데는 오랜 시간의 투자가 필요할테고 아이의 개성을 알고 바르게 성장하도록 도와 주어야하는데

겁쟁이요 비겁했던 나는 빠른 시간 안에 결과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체벌을 택한 것이고.

그런 무지몽매했던 나를 질책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할머니의 손자는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어서 검사결과 스페셜 스쿨 디스트릭으로 배정을 받았다 고 한다. 영어가 부족한 할머니가 그걸 잘 모르고 깡패학교라고 지칭을 하신거라는...



암튼
둘째가 성인이 된 어느 날 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진심으로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무지몽매했던 엄마를 용서해 다오!


둘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엄마를 사하노라!


둘째야 미안하고 고맙다..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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