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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Jul 02. 2019

특강과 이불 빨래

어느 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일이 다 내 일이었다.

2019. 5. 28


5월은 이런저런 일들이 꽤 있었다. 백수로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다가 일정이 이것저것 잡히니 무척 바쁘게 느껴졌다. 특히, 5월 말에 통역과 온라인 특강이 연이어 잡혀서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통역은 날짜를 바꿀 수 없는 일이고, 처음 계획보다 늦게 잡힌 특강도 미루기가 싫었다. 특강을 미룰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한 달 정도 미뤄진 상태로 마음속 부담만 키워온 상태라 어떻게든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오랜 백수생활 탓인지 성격 탓인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굉장히 부담스럽다. 막상 닥치면 그럭저럭 잘하면서도 그전까지 잘 해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통역은 걱정이 되긴 하지만, 발표 자료를 받기 전까지 내가 할 일이 없어서 그나마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자료를 받아 준비를 마치면 걱정이 사라진다. 그러나, 특강은 다르다. 내가 정한 주제이거나 주어진 주제이거나 상관없이, 강의에 다룰 세세한 내용을 정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다. 그에 따른 자료 조사의 범위도 내가 정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무언가를 알고자 할 때, 나는 대답만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질문에 답을 원한다. 설령 그 질문이 원래 하려던 일과 거리가 상당해도 대답을 찾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진행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써야 할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보니 일의 진행이 더딘데 반해 금세 지치는 것처럼 보인다. 과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시간을 과하게 쓰다 보니 결국 시간에 쫓겨 일 마무리가 엉성해지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도 이번 특강은 내가 제시한 주제였기에 초반의 호기심 충족을 위한 광대한 자료 조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일종의 취미생활 영위를 포함한 자료 조사였다. 강의 목적보다는 순수하게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자료를 검토했기에 특강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내용도 많았다. 약속된 날짜 덕에 어느 순간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자료 조사의 방향을 한정할 수 있었다. 초반의 광대한 자료 조사 탓에 상대적으로 특강이 다루는 내용이 부실하지 않나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학생들의 반응을 고려하면 나의 우려는 기우였다. 나의 강의는 주제에 해당하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라 구분 없이 들이대는데, 한국에 자세히 소개되지 않는 사례가 꽤 있어서 학생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번 특강이 학생들에게는 광대한 자료의 폭격이었던 것 같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이 상당했고, 중간에 회의 때문에 나갔던 학생 하나가 다시 돌아온 점으로 미루어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부담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특강이 끝나고 나니, 기운이 쫘악 빠졌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강의는 오후 1시가 다돼서 끝이 났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때마침 귀여운 딸이 아침에 마련해준 집안일이 있었다. 딸이 차고 있던 기저귀에서 오줌이 세서 이불과 시트는 물론 매트리스 탑퍼까지 살짝 젖었다. 다행히 탑퍼의 커버가 두꺼워서 스펀지까지는 젖지 않았다. 다른 것은 여유분이 있어 상관없지만 탑퍼 커버는 바로 말려야 해서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아파트의 세탁실의 존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예약이 꽉 차있지 않아 세탁실 사용이 가능했다. 세탁실에는 세탁 시간이 길지 않은 대형 세탁기와 바로 옆 대형 건조기가 있어 부피가 큰 빨래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힘든 일은 딱히 없었지만, 세탁실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원래는 강의 후에 누군가와 맛있는 점심과 함께 낮술을 하고 싶었는데... 얼결에 집에 메여서 시간이 쓰윽 흘러갔다. 어떤 일이든 마무리를 하게 되면 여운이 남아 한동안 집중하기 힘든데 그 시간을 빨래로 채웠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으니, 나쁘지 않은 채움이었다.


아침에 왜 하필 이런 날...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이어서 다행이었다. 어제이었거나 그 전날이었다면 마음이 정말 불편했을 것이다. 딸이 이불을 적시는 일은 매우 드물다. 어쩌다 생긴 일인데 운이 나쁘다고 지나치게 불평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상당 시간 동안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일이 끝나고, 멍해져 있을 순간을 채워졌으니 고마운 일이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지친 내게 빨래는 움직임을 강요해 정신적 물리적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상쾌한 잠자리까지 덤으로 얻었으니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이불 빨래도 내 일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일이 삶을 더 많이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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