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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흔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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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Jul 04. 2019

살라미의 추억: 처음 마주한 그날

시각적 충격, 썩은 생고기를 주네! 차마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소리

배경 이미지 출처: Pixabay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먹었다. 샌드위치는 유기농 시골빵 (luomu maalaisleipä)을 잘라 토스터기에 빵을 데운 뒤 후무스를 바르고 치즈와 헤이즐넛이 들어간 살라미를 얹었다. 마요네즈가 들어간 시판 비트루트 샐러드 (punajuuri salaatti)와 사과, 상추, 오이, 토마토, 두 가지 치즈에 간장과 참기름을 기본으로 만든 소스를 넣은 신선한 샐러드도 접시 위를 한 자리씩 차지했다.


식구들이 각자 취향(?)대로 서로 다른 점심을 먹었고, 아들과 딸을 먼저 챙기느라 나는 조금 늦게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점심을 거의 다 먹은 딸이 내 손에 들려있는 샌드위치 위의 살라미를 가리키며 아빠에게 무어냐고 물었다. 아빠는 햄을 무척 좋아하는 딸에게 살라미라며 애들은 짜서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며 내게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걱정 마시게, 이 사람아! 딸과 살라미를 나눠먹을 생각이 1도 없다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살라미에 대한 부녀의 짧은 대화는 살라미를 처음 접하고 식겁했던 그 옛날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2001년 가을, 첫 유럽 여행, 스위스 바젤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가는 밤 기차에서 만난 스위스 아가씨 덕에 무계획이었던 나의 숙소가 YWCA에서 운영하는 호스텔로 정해졌다. 오래전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친구와 로마를 하루 정도는 같이 다녔던 것 같다.


같이 늦은 점심인지 저녁을 먹는데 스위스 친구가 내게 메인을 각자 시키고 안티파스토 (Antipasto)를 하나 시켜서 둘이 나눠 먹자고 제안을 했다. 별생각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녀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겼다. 당시 나는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그녀가 골라주는 대로 먹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차렐라 치즈와 살라미를 포함한 여러 가지 햄이 나오는 안티파스토를 주문했다.


지금이야 그때 그 맛있는 것들을 왜 즐기지 못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당시에는 시각적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썩은 생고기 같은 것들을 얇게 저며서 내놓은 이 접시는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저걸 지금 그냥 생으로 먹으라고 내 앞에 디민 것인가? 미쳤다! 미쳤어! 스위스 사람이라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었건만, 혼자만 날름 먹을 수 있는 이상한 음식을 시키다니...


별 맛 안나는 모차렐라 치즈만 몇 개 집어 먹고, 그 뒤 나온 짜디짠 파스타를 간신히 조금 입에 밀어 넣는 것으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의 첫 식사를 마쳤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모차렐라 치즈의 맛도 이탈리아 햄과 살라미의 맛도 파스타의 맛도 음미할 줄 전혀 몰랐었다. 레스토랑에 돈을 그냥 뿌리고 온 듯한 씁쓸한 식사 뒤 괜스레 그녀와 거리가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부스럭 대던 나 때문에 아침잠을 설친 듯한 그녀와 나는 미묘한 신경전으로 인해 그날부터 각자 로마를 즐겼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그녀를 혼자만 먹을 수 있는 애피타이저를 고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치부했고, 나의 움직임 소리가 크다는 걸 몰라서, 아침 일찍부터 본의 아니게 시끄럽게 굴기까지 했다. 지금의 나라면 애먼 오해도 하지 않았을 테고, 이른 아침 소음도 적었을 텐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스위스 처자여~ 미안하다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음식들이지만, 그때의 그 강렬한 썩은 생고기 느낌의 시각적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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