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 돕는 사람, 인식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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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American Innovations의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피임약 탄생에 얽힌 이야기 (The Birth Control Pill)를 소개하고자 한다. 팟캐스트 링크 아래의 글은 위키피디아 (Wikipedia)의 자료와 팟캐스트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먹는 피임약 탄생에 관한 글이다.
1900년대 초 미국, 피임이나 가족계획 개념이 없던 시절, 연속적인 임신과 출산은 여성들의 건강 (빈혈, 자궁 파열, 유산)을 위협했다. 특히, 빈곤층에게 빈번한 임신은 가정을 존폐위기로 몰아넣는 주된 요소였다. 이미 출생한 아이들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에서 새로운 아기는 축복이 아닌 경제적 위협이자, 지속된 임신, 출산으로 미처 회복하진 여성은 물론 이미 출생한 아이들의 건강까지 위협하는 큰 부담이었다. 빈곤도 빈곤이었지만, 당시 낙태가 불법이었기에, 다수의 여성들이 위험천만한 민간요법을 이용한 자가 낙태를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목숨까지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일부 여성에게는 목숨을 걸만큼 무서운 일이 임신이었다.
그 시절 뉴욕의 빈민가에서 방문 간호사로 일하던 마가렛 생거는 가족계획이나 피임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지속적인 임신으로 만신창이가 된 여성들을 많이 봐왔으며, 그중 위험천만한 자가 낙태를 시도하여 생명을 잃는 이들도 목격했다. 이는 그녀가 피임 지식의 보급에 대한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이 출산에서 충분히 회복한 뒤, 건강한 임신과 출산을 계획할 수 있는 기회는 물론 여성의 자유로운 사회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피임 지식의 대중화가 필요했고, 이는 건강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기본 요소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는 피임이 불법이었다.
생거의 어머니는 18번의 임신과 11명의 출산을 경험했으며 49세에 사망했다. 이 또한 그녀에게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녀는 결국 1916년에 미국 최초의 피임 병원 (birth control clinic)을 열었는데, 병원은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그녀는 외설 법을 어긴 혐의로 30일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활발한 여성운동가였던 생거는 그녀답게 수감기간 동안 교도소의 여성 수감자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쳤다. 엄연한 불법인 피임 병원 설립과 공공연한 병원 홍보로 인한 체포와 재판 덕에 생거는 피임과 가족 계회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었다.
피임과 가족계획에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는데 전념한 생거는 낙태를 권장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는데, 그녀는 분명하게 낙태와는 거리를 유지했으며, 불필요한 낙태 방지를 위해 피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생거에 대한 또 다른 비판으로 그녀가 우생학에 동조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의견이 있는데, 무분별한 출산으로 인한 피해를 막는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피임과 가족계획의 개념을 널리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생거는 경구 피임약을 꿈꿨다. 안전하고 효과적이고 편리한, 여자가 주체가 되는 경구 피임약을 꿈꾼 생거는 그레고리 핀커스 (Gregory Pincus) 박사를 만나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코넬과 하버드에서 수학한 생물학자 그레고리 핀커스 박사는 호르몬에 대한 전문가로 토끼 난자의 체외수정 실험을 성공시킨 연구 발표 덕에 한때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호르몬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 충족을 지속하기 위해 그는 1944년 생물의학 연구소를 위한 워체스터 재단 (Worcester Foundation for Biomedical Research)을 설립하였다. 1951년, 핀커스는 생거를 만나 그녀가 꿈꾸던 간편하고 효과적인 경구 피임약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핀커스는 워체스터 재단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M.C. Chang과 함께 프로게스테론을 활용한 피임약 개발 연구를 수행하였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최초의 경구 피임약인 Enovid의 탄생을 이끌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캐서린은 여성으로 두 번째로 MIT를 졸업한 생물학자였다. 그녀의 재학 시절 MIT는 남녀공학을 표방했지만, 당시 대학위원회는 입학 전 수강해야 할 수업들은 물론 여러 가지 추가적 요구사항으로 여성의 대학 입학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1902년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하고 입학시험에도 통과한 맥코믹은 재학 시절 동료들과 교수들에게 늘 환영받지 못했다. 일례로 당시 대학에서 여성들에게 모자를 착용할 것을 요구했었는데, 맥코믹은 실험 수업 시간에 화재위험을 이유로 모자 착용을 거부했다가 수업에서 쫓겨났다. 이에 굴하지 않은 맥코믹은 학교 측에 정식으로 항의해 안전상의 이유를 관철시켜 학교의 정책을 바꾸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 스탠리 맥코믹 (Stanley McCormick)을 만나 의학공부 대신 결혼을 선택했지만, 2년 뒤 남편이 정신분열증을 진단받으면서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을 하였다. MIT의 여성 배타적의 경험 탓이었는지, 남편의 병 때문이었는지 맥코믹은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정진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 참여는 그녀에게 여러 여성운동가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마가렛 생거도 그중에 하나였다. 1920년대 맥코믹은 생거의 피임과 가족계획 활동을 돕기 위해 유럽에서 여성용 피임기구 (diaphragm) 1000개를 밀수하는 등 생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3년 생거의 소개로 맥코믹은 경구용 피임약 개발 연구가 자금난에 시달리던 핀커스를 만나게 되었고, 생물학자로 그의 연구의 잠재력을 인정하여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자비로 지원한 금액은 총 2백만 달러로 오늘날의 돈으로는 2천만 달로 (약 235억 7010만 원)에 달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유명한 불임 전문 산부인과 의사인 존 락은 직업상 원치 않은 임신으로 자궁 파열, 조기 노화, 수많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지 못해서 격게 되는 좌절 등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수없이 목도하였다. 그 결과 락은 빈곤과 임신으로 발생하는 의학적인 문제를 예방하는 방법으로 피임을 지지하였고 피임법을 교육하였다. 핀커스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피임약 임상 실험을 제안했을 때 락은 불임 연구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핀커스가 법을 피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경구 피임약 Enovid의 판매가 시작되자, 락은 여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경구 피임약에 대한 가톨릭의 승인을 독려하였다. 대중의 존경을 받던 보수적인 의사였던 락의 피임약 지지는 피임약에 대하 사회적 거부감을 상쇄시켜 피임약의 대중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혹자는 경구 피임약 개발은 그레고리 핀커스의 업적이라고 간단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거의 영감과 열정이 없었다면 핀커스는 피임약 연구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의 동료 M.C. Chang이 없었다면 피임약 개발이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맥코믹의 여성을 위하는 이타적인 마음과 함께 그녀의 부가 없었다면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임신, 출산으로 인해 고통받으며 사회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또한 핀커스가 사람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피임약 임상 실험을 할 수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상황을 우연히 알지 못하였다면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피임약의 혜택을 누리는 시기가 매우 늦춰졌을 수도 있다. 피임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이끈 락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다. 또 생산 결정 덕택에 상당한 이익을 챙기긴 했지만, 논란의 여지가 컸던 약의 생산을 결정한 제약회사의 공도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 경구 피임약의 탄생은 개발에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보탠 이들이 함께 이뤄낸 쾌거이다. 그러므로 경구 피임약 개발은 핀커스 개인의 업적이 아닌 이들 모두의 업적으로 세상에 기억되길 바란다.
물론 푸에르토리코에서의 대대적인 임상실험과 불법이었던 피임에 대한 연구, 부작용에 대한 미고지 등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경구 피임약 개발에 과정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누기엔 너무나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핀커스가 윤리보다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에 집중하는 성향이 있어 보여서 그가 사회의 위협을 가하는 연구를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보류하고 싶다. 원치 않는 임신의 해결책으로 낙태를 찬성하지만, 웬만하면 그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큰 나의 낙태를 대하는 입장과도 좀 비슷하지 않을까? 애초에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피임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부작용을 외면하지 못하는 찜찜함이랄까? 어쨌든 나는 한발 물러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 그 선택으로 인해 짐을 지고 사는 사람도 내가 아닌 그 당사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