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 Dec 06. 2019

필리핀 가정부 이야기

노예란 무엇일까?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보기 위해 늦은 밤 친구 집에 들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자신이 최근 접한 글을 읽어보라고 링크를 보내줬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글이라며 아마도 글쓴이가 자신의 아주 먼 친척일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상당히 긴 글이지만, 중간에 보면 오디오 버전 (55:35)이 있다. 읽기 부담스럽다면 듣는 것을 추천한다. 글을 읽기보다는 듣기를 선택했더라도 문단 사이사이 사진들이 꽤 있으니 살펴보기를 권한다. 




My Fmaily's Slave


글은 미국으로 이민 온 필리핀 가족을 따라온 가정부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글의 주인공은 부모의 늙은 남자와의 결혼 강요를 피해 자발적으로 12살의 엄마 없던 글쓴이의 어머니를 보살피는 평생의 노예가 되었다. 그녀는 글쓴이의 가족을 따라 미국까지 오게 되었고, 집안일은 물론 일 하느라 바쁜 글쓴이의 어머니 대신 글쓴이와 그의 형제들을 돌보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웠다. 


글쓴이의 부모님은 착실한 이민자로 살아갔지만, 그녀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글쓴이의 부모의 노예로, 가정부였고 아이들의 보모이자 미국 생활의 고됨을 푸는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부모와 달리 그녀를 존중했던 글쓴이 덕에 그녀는 글쓴이 가족과 말도 안 되는 상하관계에서 애매모호한 가족관계로 삶을 마감했다. 100년 전은 되었을법한 시기 살았을 것 같은 그녀는 2011년에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우리와 일정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이었다. 



단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필리핀계 미국인인 친구도 엄마 쪽에 글의 주인공처럼 노예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글처럼 그들을 홀대한 적은 없지만 집안일을 해주는 이모나 할머니라고 불리는 분들이 있었고, 친구는 그들의 자식들을 입양된 사촌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엄마 쪽 가족들은 집안일을 해주던 이모나 할머니의 노고에 대해 그녀들의 가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집을 사주는 등의 대가를 지불했지만, 직접적으로 임금을 지불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친구 엄마 쪽 사람들과 그들의 집안일을 돌봐주던 사람들은 종국에는 다 한 가족처럼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들이 노예였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내게 보내준 링크의 글을 읽고 그들을 노예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많이 심란했다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나 친구가 보내준 링크의 글에 의하면 예전 필리핀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형편이 나은 집에서 자발적 노예살이(가정부)를 했다. 대가는 주인이 본인이 아닌 노예살이를 하는 사람의 가족들을 보살펴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 사람이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필리핀 문화에 상당히 깊게 각인된 듯하다. 


가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필리핀의 많은 누군가는 해외로 가정부 살이를 떠난다. 소위 잘 사는 나라에서 만나는 필리핀 출신의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노동의 대가를 본인들이 받아서 가족들을 챙긴다는 점이 예전과 다를 뿐이다. 자신들이 일한 대가를 직접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예가 아닐까? 그들의 고용주가 아닌 그들에게 기대어 있는 가족들의 노예 말이다. 예전에도 실은 자신들의 몸값을 지불하는 집의 노예가 아닌 몸값을 챙기는 가족들의 노예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누군가의 삶들이 안타깝다. 



매거진의 이전글 환자를 해치는 의사: 닥터 데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