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이미지 출처: http://program.tving.com/tvn/blackdog 사이트 이미지 캡처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던, 마음이 헛한 어느 날 밤, 라미란이 나오는 블랙독의 한 장면을 유튜브에서 접했다. 라미란에 홀려 블랙독 1회를 찾아보다 보니 6회까지 연달아 보게 되었다. 덕택에 새벽에 잠들었다. 내가 알던 학교와 달려진 학교의 모습이 신기했다. 직장으로 학교를 그려내는 드라마가 신선했다. 기간제 교사와 정교사의 신분 차이에 대한 묘사가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내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블랙독을 찾아보게 되었다.
나는 계약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채가 없던 해에 디자이너 인력이 대거 필요했던 회사는 기존의 계약직 중 한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고, 한 명은 계약을 연장했을 뿐 아니라, 두 번에 걸쳐 10여 명이 넘는 계약직을 뽑았다. 계약직은 기본적으로 1년 계약을 하지만, 입사 시기가 1월 중순인 탓에 그해 말까지 계약서를 작성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는 그저 그 계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계약이 종료되면서 1년에서 10여 일이 부족해 퇴직금을 못 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저 운 없음을 탓해야 했다.
"계약직~ 계약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무례한 낙하산 대리도 있었고, 후배라며 잘 챙겨주며 이끌어주던 선배도 있었다. 정규직이라고 머리 쓰는 일을 하고 계약직이라고 단순한 일을 하진 않았다. 그저 각자에게 할당된 업무가 달랐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무례하게 굴던 낙하산 대리가 하던 일이 단순했다. 낙하산 대리는 워낙 무능해서 무시하고 살 수 있었으나, 계약직의 굴레를 느낄 수 있는 계기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일단 계약직과 정규직의 월급이 상당히 차이가 났다. 공채가 없어서 계약직으로 들어왔으나, 대단한 공채의 벽에 대한 예우처럼 굴길래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진짜 치사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설에 주는 선물까지 차별을 하는 회사의 태도였다. 정규직용과 계약직용을 따로 구분해서 선물을 마련한 회사 측의 노력이 신기했다.
정규직이 파업을 하자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측의 압박 같은 격려가 우스웠다. 그제야 디자이너만 계약직으로 뽑은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공채가 없다는 핑계로 곳곳에 부족한 인력을 계약직으로 촘촘히 채워놨던 회사는 파업 때 그 노력이 빛을 발했다. 정규직의 파업 동안 계약직이 본연의 업무를 미루고 서비스 운영에 힘쓴 탓에 정규직의 부재를 사용자가 느낄 수 없었다.
파업 때 계약직도 동지인 양 계약직의 처우 개선까지 외쳐주던 정규직들은 사측의 정규직의 처우 개선안을 내세우자 계약직에 대한 요구는 까맣게 잊었다. 게으른 정규직이 계약직이 마치 노예 인양 자신의 일을 떠넘기려다 계약직이 거부하자 다른 바보스러운 정규직까지 끌어들여 계약직을 압박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12월 초 즈음 다른 회사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하던 업무가 좋았고 1년이 채 안 되는 경력으로 남기는 게 싫어서 사수로 함께 일하며 아껴주던 대리를 불러 계약 연장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그는 팀이 통합되면서 일부 디자인 인력이 불필요해져서 계약직 디자이너 일부만 계약을 연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계약직이라는 자리라 붙잡긴 미안하지만 연장 대상자에 포함이 되니 원한다면 남으라고 했다.
회사에 남기로 결심을 한 뒤 일부만 계약이 연장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디자인팀 분위기가 들썩였다. 계약 연장 언질을 이미 받은 몇몇과 자긴 계약이 연장이 안될 거라며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 그냥 무던한 사람 등 다양한 군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인사팀이 이 불협화음을 감지했다.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최소 15일 전인 날, 계약직 디자이너를 하나씩 불러 모두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치사스럽지만 항의할 수가 없었다.
일부 계약 연장으로 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시끄러워지는 것보다는 다 내보내고 새로 뽑는 게 깔끔하다는 게 인사팀의 입장이었다. 일괄 계약 종료라는 통보를 받고 얼떨떨한 나를 부장이 불렀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걸 자기가 아는데 지켜줄 힘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 연장 대상자라고 미리 언질을 준 대리도 인사팀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거라 자기도 어쩔 수 없다며 난처해했다.
충격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해 순응하고 받아들였다. 그 시절 나는 1월 중순에 계약서를 써도 1년짜리를 쓰겠다고 우겨야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계약서대로 최소 통보 기간에 맞춰 계약 종료를 알린 회사 측에 인간적으로 너무하다는 말도 못 하는 바보였다. 그저 실속 없이 부장이 내게만 사과를 했다는 사실로 내가 일을 못해서 잘리지 않았다는 쓸데없는 자긍심만 간직한 채 그 회사를 나왔다.
그 시절 기억 때문인가? 블랙독의 정교사 채용에 관한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특히, 상황이 복잡해지자 이미 세웠던 기준도 버리고 상황을 모면했던 첫 직장 인사팀의 태도와 "국어과 정교사 적격자 없음"이라는 블랙독의 학교 측 결과 발표가 겹치면서 해묵은 짜증이 밀려왔다.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1차 필기를 1등 한 고하늘과 2차 면접을 1등 한 지해원 사이에서 라미란이 연기한 진학부장 박성순과 교무부장 문수호가 6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점수를 크게 쳐주며 지해원을 밀어줄 때 순간 나는 둘의 최종 합산 점수가 거의 같은 줄 알았다.
객관적으로는 고하늘을 뽑아야 하는데라고 말문을 연 박성순 부장의 말에서, 필기에서 5등을 한 지해원을 뽑으면 교육부 감사에서 문제가 될 수 도 있다며 고하늘을 두둔한 도연우 선생님의 말에서 1등은 고하늘 임을 짐작할 수 있다. 1 등이 있지만 6년의 시간을 차마 무시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아무도 뽑지 말자는 학교 측의 결정에 기가 찼다. 고하늘이 내막을 알게 된다면 평가가 공정했다고 수긍할 수 있을까? 애초에 채용공고에 본교 근무 경력에 따라 가산점이 있다고 나온 것이 아니라면 기준을 버리고 감정에 기대는 두 부장과 행정실장의 조카 채용 노력이 다른 게 멀까?
여전히 기간제 교사지만 아이들이 마음에서 인정한 고하늘이 진짜 선생님이 되었다는 12회의 마무리는 무엇인가? 직장으로 학교를 그려내는 드라마이지만 교사 중 진짜는 얼마 없다는 이야기인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학생 저런 학생 있듯이, 이런 교사 저런 교사 있는 것이지, 진정한 교사라는 교사 위의 또 하나의 기준은 무엇인가? 진정한 학생, 진정한 사람이 있는가?
왜 한국 사회는 "진정한"이라는 형용사로 사람들을 옭아매는지 모르겠다. 직업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면 되는 것이지 왜 그 요구를 뛰어넘어야 하는가? 요구를 뛰어넘을 때마다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누구에게 좋은 교사가 누구에게 나쁜 교사일 수도 있는데...
안 그래도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는 학창 시절을 살아낸 청년들에게 기간제라도 보상이 적더라도 진정한 직업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으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그에 따라 이만큼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같이 해주던지 그렇지 않다면 청춘들을 자유롭게 좀 놔뒀으면 좋겠다.
어쩌다 보니 블랙독이 못마땅하다는 이야기 조로 흘렀는데 현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이들에게 다양한 말을 건네는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산다 그러나 진정한 선생님이라는 화두는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게 요구사항에 맞는 교사가 난 더 좋다. 할 일하고 자유를 누릴 때 누리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교사가 더 멋지지 않은가? 무엇이든 지나치지 않아야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지속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