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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May 14. 2022

작은 아파트 (36㎡)의 넓은 욕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뉴스를 접하며 떠오른 생각 셋

배경 이미지 출처: Pexels



유학생답게 줄곳 학생 아파트만 전전하던 나는 취업 후 천천히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있었다. 헬싱키 시립 아파트를 지원해보라는 친구의 권유에 별생각 없이 웹사이트를 둘러봤는데, 모교 근처 신축 아파트의 입주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지원서를 작성하며 추가 정보란에 그때 사정을 구구절절 적었다. 아파트 문제로 본의 아니게 이사를 두 번 하게 된 경험과 고등학생 플랏 메이트 덕에 매주 주말 고등학생들의 아지트가 되는 아파트에서 제대로 된 휴식이 어려운 사정까지 나열하며, 이사 걱정 없이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는 읍소였다. 돌이켜보니 구구절절 추가로 적었던 사연 탓에 운 좋게 원하던 아파트에 입주했다. 


헬싱키 시립 아파트는 임대료가 시세보다 저렴하고 관리가 잘 돼서 인기가 상당하다. 게다가 보증금도 없고, 거주기간의 제한이 없다. 그래서 입주가 결코 쉽지 않은 곳이다. 헬싱키 공무원, 여러 가지 이유로 급작스레 집의 규모를 줄이거나 늘려야 하는 경우,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 등 다양한 경우를 감안하여 가산점을 부여해 우선순위를 따져 입주자격을 부여한다. 지원하자마자 바로 입주 자격을 얻은 터라 주거문제를 고민하는 지인들에게 종종 지원해보라고 추천했지만, 막상 입주를 한 지인은 한 가족뿐이었다. 살던 아파트를 팔고 땅을 사서 집을 지을 계획을 하던 지인은 집을 짓는 동안 살집으로 헬싱키 시립 아파트 입주를 신청했고, 현재 거주 중이다.  


새집 입주라 건물이 완공되는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뿐 아니라 구매자처럼 입주 전 아파트 완공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입주 지원할 때 평면도를 볼 수 있었지만, 헬싱키에서 처음으로 혼자만의 공간을 구한다는 설렘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주변 시세보다 200유로 정도 저렴한 집세에 새집이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아파트에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던 나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 함께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36 제곱미터의 스튜디오 플랏은 한쪽 벽면이 옷장에서 싱크대 장으로 쫘악 채워진 수납공간이 넉넉한 곳이었다. 직사각형에서 발코니 공간을 제외하면 'ㄱ'자 형태의 구조로 벽이 따로 있진 않았지만, 주방과 수면 공간이 자연스럽게 나눠져 혼자 살기에 편안해 보였다. 그런데 아파트 크기에 비해 욕실이 상당히 넓었다. 욕실이 싱글 침대가 들어가고도 자잘한 가구를 넣을 수 있을 정도의 방과 같은 크기였다. 집들이 때 놀러 온 친구가 우리 집 욕실이 자기 방보다 더 아늑하다며 지내게 해달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욕실 바닥에만 열선이 깔려있던 탓에 온돌방이라 여기고 욕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잘까 잠시 고민한 적도 있다.


입주 전 확인차 아파트를 둘러보는 과정에서 공사 관계자에게 자잘한 요구사항을 전달하면서 호기심에 욕실이 아파트 크기에 비해 과하게 넓은 이유를 물었다. 시립 아파트라 휠체어 장애인이 입주할 경우를 감안해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화장실이 크게 설계되었다는 답을 들었다. 장애인을 위한 아파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닌 누구나 거주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지어진 그 아파트는 화장실이 큰 탓에 거주 공간이 좀 작아졌을지도 모르지만 화장실이 커서 불편했던 적은 없다. 후에 가족을 이루어 이사한 집도 시립 아파트로 처음 살던 아파트보다 5년 전에 지어졌는데, 욕실이 휠체어가 드나드는데 불편함이 없을 크기였던 걸 감안하면 어느 순간 욕실 크기에 대한 규정이 마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뉴스가 종종 눈에 띌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데, 가끔 예전에 혼자 살던 아파트의 넓은 욕실이 떠오른다. 한국도 교통수단은 물론 주거환경에서 휠체어가 드나드는데 문제가 없도록 욕실까지 넓게 설계하는 세세한 배려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길 소망해본다.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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