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물어나 보자!

내 친구는 자기가 쓰던 노트북과 함께 회사를 떠날 수 있었다.

by Ji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회사가 기울면서 여러 번의 정리해고 물결이 일었다. 디자인 팀에 있던 나도 다른 팀에 있던 내 친구도 그 물결에 휩쓸려 회사를 나왔다. 퇴직금 제도가 없는 핀란드에서 대량의 정리해고를 무탈하게 단행하기 위해 회사는 근속연수에 비례한 보상금을 제시했다. 덕분에 회사를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지만, 동시에 소소하지만 다양한 아쉬움을 느꼈다.


다양한 아쉬움 중 하나는 당장 내 것처럼 쓰던 노트북을 반납하는 것이었다. 육아 휴직 중이던 내게 많은 휴식을 주던 노트북을 돌려줘야 하다니, 마치 내 것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문득 3년 이상 노후된 컴퓨터는 문제없이 돌아가도 새것으로 교체해주는 회사의 방침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되는 손해가 적정시기에 컴퓨터를 교체하는 비용보다 더 클 수 있기에 시행되고 있는 규정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매니저에게 사용하던 노트북과 함께 퇴사를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노트북이 3년이 되진 않았지만, 대규모 퇴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내가 사용하던 노트북이 필요한 신규 인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이미 빠져나간 인력들로 인해 노트북이 남아나는 상황일 테니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회사가 업무용으로 구매해준 휴대폰과 함께 퇴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들어줄 만도 하다 싶어 부탁했지만, 매니저는 원칙을 내세우며 내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서운했지만 원칙은 원칙인지라 노트북을 회사에 돌려주었다. 돌려주러 간 김에 때마침 다른 부서에 있던 친구를 잠시 만났다. 정리해고의 물결을 퇴직금을 받고 퇴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긴 친구는 이미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직 예정이라는 소식을 정했다. 어차피 기울어지고 있는 회사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레 노트북 반납이 화제가 되었다.


곧 회사를 나올 친구도 나처럼 사용하던 노트북과 함께 퇴사를 하고 싶다고 매니저에게 요청을 했고, 친구의 매니저는 내 매니저와 달리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원칙을 내세워 내 부탁을 거절한 매니저가 갑자기 급 미워졌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친구나 나나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에서 회사 측에 배려를 요구했고 나는 거절당했고, 친구는 배려를 받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단축근무의 애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