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 수리에 있어선 지속가능성이 많이 부족한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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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계획대로라면 세탁이 끝난 빨래를 널고 집을 나설 준비를 할 시간이었는데,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세탁기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그에게 세탁기가 이상하게 작동하니 다 돌아가도 그냥 놔두라고 해놓고 집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보니 세탁기는 멈춰있었고, 별 문제없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세탁기에 남아 있는 물을 빼고 필터에 먼지를 제거했다.
다음날 별생각 없이 세탁기에 빨래를 돌렸다. 어쨌든 전날 세탁이 되었으니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전날처럼 세탁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빨래고 머고 일단 세탁기를 살펴야겠다는 생각에 돌리던 프로그램을 취소하고 탈수를 돌렸다. 물을 빼야 빨래를 꺼낼 수 있고, 그래야 세탁기를 대충이라도 살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배수가 되지 않았다. 배수가 되지 않아 세탁 시간이 늘어지고 있었다.
결국 세탁기 아래쪽에 있는 필터를 열어놓고 탈수를 돌려서 세탁이 되다만 빨래를 꺼내놓고 세탁기를 살폈다. 필터를 다시 잠그고 텅 빈 세탁기에 물을 받은 뒤, 세탁기의 물을 비우려 했는데, 물이 빠지지 않았다. 갑자기 작동하지 않는 세탁기가 야속했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세탁기를 구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래지어에서 빠진 와이어 때문에 세탁기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돌아갔던 적이 있다. 와이어를 빼기 위해 서비스 기사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서비스 기사는 성실하게 세탁기를 살짝 분해해 해결책을 살폈으나, 드럼과 세탁조 사이에 낀 와이어를 빼는 것보다는 새로 세탁기를 구매하는 것이 저렴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비스 기사는 오프 더 레코더로 엄청난 소음을 참을 수 있다면 세탁기를 그냥 사용해도 된다는 조언도 해줬다.
사실 서비스 기사가 세탁기를 고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세탁기라 본인 부담금을 제외해도 집보험에서 얼마간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겠다 싶어 보험비 청구를 위해 서비스를 불렀다. 수리불가라던가 수리비가 얼마 필요하다는 진단이 있어야 보험회사에 그에 따른 보상을 청구할 수 있었다. 감가상각비와 본인 부담금을 제외한 보상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래된 일이고 그가 처리했던 일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보상금으로 서비스 기사를 부른 값(아마도 120에서 180유로 정도였던 것 같다.)을 내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엄청나게 시끄럽긴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세탁기였기에, 우리는 급하게 세탁기를 구매할 생각이 없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뜬금없이 세탁조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와이어가 세탁조 구멍사이로 삐죽이 나와서 와이어를 빼냈다. 덕택에 고장 나서 수리불가 판정을 받았던 세탁기가 어이없게 멀쩡한 세탁기가 되었다. 그 세탁기가 몇 년간 무탈하게 작동했다. 아직은 고장 나기 이른 시기였지만, 그 세탁기가 또다시 우리에게 자신을 버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우리 기준으로는 오래된 세탁기가 아니지만 보험사 기준으로는 오래된 세탁기인지라 본인 부담금을 제외하면 보상금이 없을 것이 자명했다. 서비스 기사를 불러서 고치면 좋지만, 수리 불가라는 판정을 받아도 상당한 출장비를 부담해야 하기에 서비스 기사를 부르지 않기도 했다. 다행히 아파트에 공용세탁실이 있어 세탁기를 급하게 구매하지 않아도 됐다.
그가 세탁기를 살 때 사더라도 어차피 버릴 세탁기 우리가 일단 뜯어서 고칠 수 있나 살펴보자 제안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가 MSX 컴퓨터 덕후라 집에 쌓여있는 오래된 컴퓨터들을 지지고 볶던 가닥이 있기에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그렇게 둘이 함께 세탁기 배수 부분을 떼어봤다. 그가 물을 호스로 빼내주는 작은 프로펠러가 달린 펌프가 뻑뻑해서 배수가 안 되는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우리는 펌프 뒤에 숨겨진 공간 안에 이물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어찌어찌하다 펌프 뒤 숨겨진 공간을 분리했는데, 물때가 한가득이었다. 물때를 제거하고 다시 조립을 해보니 뻑뻑했던 프로펠러가 매우 부드러워졌다.
우리가 세탁기를 고친 것 같았다. 세탁기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세탁기에 물을 받은 뒤 물을 빼봤다. 호스로 물이 잘 빠져나갔다. 우리는 운 좋게 세탁기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지속가능성에 관해서는 세계적으로 앞선다는 북유럽 국가 중 하나인 핀란드에서 가전제품에 한해서는 지속가능성을 논하기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가전제품이 수입이라 한국에선 흔한 서비스센터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래서일까? 보증기간 내 고장 난 전자제품은 수리보다 새 제품 교환이나 환불이 원칙인듯하다. 수리를 하려면 다른 나라의 공인된 서비스센터나 공장에 보내야 해서 물류비용과 시간을 감안하면 새 제품 교환이나 환불이 더 효율적이라 여기는 것 같다.
보증기간이 끝난 제품의 경우 수리기사에게 수리를 의뢰할 수 있지만, 기본 비용이 저렴하지 않다. 부품이 없는 경우엔 부품을 주문해서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리를 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대부분 고장 나면 큰 망설임 없이 새 제품을 사게 된다. 물론 소모품이라 부품을 쉽게 교체할 수 있는 제품은 각자 알아서 부품 취급자를 찾아 주문해서 교체한다. 만약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 내리지 못하거나 부품 취급자를 찾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미련 없이 새 제품을 살 것이다.
그나마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와 같이 가격이 어느 정도 나가는 가전제품은 고쳐 쓰려고 수리기사를 부르기도 하는데, 고치지 못할 경우에도 여전히 수리기사가 살펴본 시간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해서 수리를 망설이게 된다. 수리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생활을 유지해야 하니 적당한 비용지불은 필요하지만, 과하다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고장 난 제품을 고치더라도 또 고장 날 수 도 있으니, 수리비보다 조금 더 비용을 들여 확실히 오래 쓸 수 있고 보증기간도 2년인 새 제품을 구매하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지속가능성을 사회 곳곳에서 외쳐대는 핀란드에서 전자제품을 수리해서 쓰기가 망설여진다는 게 참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