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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Feb 28. 2023

오랫동안 함께 한 밥솥을 보내며...

쓸데없이 물건에 애착을 가져서 작별하기 힘들어하는 나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일요일, 점심으로 그에게는 두부 버섯 스튜(지난주에 해놓은 거라 먹어치워야 했다.)를, 아이들에게는 시금치 된장국에 수육을 줄 생각이었다. 배가 고파 내가 먼저 어묵볶음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밥이 없었다. 새로 밥을 하려고 쌀을 씻어 밥솥에 안쳤는데 에러가 뜬다. 얼마 전 밥솥 잠금이 인식되지 않아 잠시동안 취사예약이 안된 적이 있는데 그때와 같은 증상이었다. 내 딴엔 밥솥을 잠가도 밥솥은 잠김을 인식하지 못해 취사 버튼을 누르면 야속한 에러 소리만 냈다.


나는 새물건도 좋아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물건에 함께한 시간만큼 애착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오래 쓰던 물건이 고장 나면 마음에서 떠나보내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쓸 만큼 써서 고장이 난 물건인 경우가 다수인데, 왜 그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냥 쿨하게 고생했다 잘 가라 하고 산뜻하게 새 물건을 사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 달래기가 귀찮아서라도 좀 바꾸고 싶은데, 40년 넘게 살며 굳어진 나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까 싶다.


당장 밥을 해야 하는데, 냄비밥을 하기는 너무너무 귀찮았다. 순간 예전에 핀란드를 떠나는 사람에게 받아놓은 밥솥이 떠올랐다. 창고에 늘 짐짝 취급받던 그 물건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창고에만 머물던 밥솥은 많이 낡아 보였다. 받아놓고 확인도 안 하고 짱박아뒀던 결과였다. 이리저리 밥솥을 닦다가 이 수준이면 고장 난 밥솥을 뜯어서 고쳐보는 게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세탁기도 고쳤는데 밥솥도 고칠 수 있겠다 싶었다. 


창고에 있던 밥솥을 한번 닦고 물만 넣어 취사를 눌러 세척을 시도하는 동안 고장 난 밥솥을 뜯었다. 뜯기 쉬워 혼자서 뜯은 몸통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문득 잠금장치 인식이니까 어딘가 케이블이 끊어진 게 아닐까 싶어 뚜껑 부분을 뜯어보려 했는데, 뜯기가 어려웠다. 이럴 땐 옛날 컴퓨터 많이 뜯어본 그가 나보다 나을 것 같아 그에게 부탁했다. 예상대로 그는 고장 난 밥솥의 뚜껑을 뜯어줬다. 뚜껑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니 케이블이 세 개나 끊어져 있었다. 여태껏 작동한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진짜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인사로 내 페북 담벼락에 밥솥 사망이라고 올렸다. 나의 밥솥아, 잘 가라! 그러고 보니 오래 쓰긴 오래 썼다. 핀란드 유학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받았으니 15년을 넘게 함께 했다. 


밥솥 사망 ㅡ.ㅡ 슬프다...



갑작스레 고장 난 밥솥 덕에 원래의 점심 계획은 무산되었고, 내가 밥솥과 씨름하는 동안 그가 알아서 점심을 챙겼다. 아이들에게는 컵라면을 그는 냉장고에서 전날 내가 그를 위해 해 놓은 채식 볶음밥을 찾아 먹었다. 그동안 나는 창고에서 꺼내온 밥솥으로 시험 취사를 했다. 다행히 잘 작동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국에 가게 되면 새 밥솥을 장만할 생각이다. 우편으로 받을 경우 통관할 때 세금이나 기타 등등의 문제와 마주할 수 있으니 그냥 올 때 들고 오는 게 맘 편할 것이다. 지금 작동하는 밥솥의 고무 패킹이 낡았으니, 그것만 한국에서 새로 사서 보내달라고 언니에게 부탁했다.


밥솥과 씨름하다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을 때 그가 조심스레 자기 엄마가 누가 죽었냐고 묻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왠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다가 문득 내가 페북 담벼락에 올린 밥솥 사망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글로 올린 글을 번역기 돌려 보다가 정확한 문맥 파악이 안 돼서 걱정을 사서 하신 것 같았다.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일일이 내 페북 글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머 어차피 아이들 사진을 빼면 별거 없으니 괜한 부딪힘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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