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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Mar 01. 2023

사라진 교과목, 교련의 추억...

중국 공산당의 영향과 한국 군사정권의 잔재가 닮았다.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석사과정 지원서류와 교련


대학원 입시철이다. 그가 오랫동안 해오던 뉴미디어 디자인 석사과정생들을 뽑는 일을 다시 마주했다. 일단 학교 측은 기본적인 요구조건에 맞는 서류를 제출한 지원자들을 걸러서 그에게 지원서를 넘겨줬다. 올해는 한 주 동안 130여 명의 지원자들의 서류를 살펴보고 면접대상자를 추려서 학교 측에 통보해야 했다. 사실상 3일 하고 반나절만에 130여 명의 서류를 살펴야 했다. 익숙해진 일이지만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 아무리 빨리해도 1시간에 10여 명의 서류를 살피는 게 최대라던 그는 일주일 내내 지쳐있었다. 


때마침 일주일간 아이들의 스키방학이 겹쳤다. 할머니집에서 스키방학을 보내기로 했던 아이들은 그와 아이들의 할머니의 잘못된 의사소통으로 집에 머물렀다. 덕택에 그는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하느라 힘에 부친 한 주였다. 결국 그는 낮시간보다는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집중해서 서류를 살폈다. 물론 그렇다고 낮시간에 서류를 전혀 살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엔 살펴야 할 서류에 양이 너무 많았다. 


한밤 중에 지원서를 살피던 그가 중국 지원자들은 학사 학위 과정에서 군사훈련, 마오사상과 같은 수업들을 이수한다면서 흥미롭다는 평을 했다. 다소 어이없다는 그의 반응과 달리 나는 속으로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대학원 동기에게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반공교육을 받았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6월이 되면 반공포스터를 그리거나 똘이장군 만화영화를 강당에 모여 봤던 기억을 나누자, 동기는 똘이장군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며 신기하다는 반응을 했다. 그가 중국 지원자들이 이수한 프로파간다적인 수업을 신기해하는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문득, 고등학교 때 배웠던 과목인 교련이 떠올랐다. 중국의 군사훈련 수업과 어떤 면에서 같은 종류였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서일까? 아님 입시에 밀려 대충 배워서일까? 응급처치법으로 붕대감기와 삼각건 매듭을 배운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특히, 붕대감기는 몇몇 친구들의 날씬한 다리를 위한 노력으로 응용되어 자주 볼 수 있었다.



교련 선생님에 대한 불쾌한 기억


연상작용으로 고등학교 시절 교련선생님도 떠올랐다. 유독 기억에 남는 교련 선생님이 있다. 우연히 그의 딸과 같은 학원에 다녀서 딸만 셋이란 걸 알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여학생을 비하하려고 애쓰던 그를 난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그 해에 고입 연합고사 하한선 점수가 이상하게도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20점 이상 높았다. 그걸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었는지, 그는 어찌 되었던 종국에는 남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더 많이 간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 시절 나는 내 인생에서 똘끼가 가장 충만했었다. 틈만 나면 여학생을 비하하던 그를 참을 수 없던 나는 선생님들이 그따위로 생각하고 여학생들 가르칠 때 신경을 덜 쓰니 그런 거 아니냐고, 설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여학생들 앞에서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는 게 어디 있냐고 따져 물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의 거침없는 따짐에 그는 그냥 돌아서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마지막 양심은 있었던지 나를 버릇없다고 윽박지르진 않았다. 윽박질러도 꺾이질 않을 똘끼가 충만하다는 걸 눈치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전엔 제주도로 가던 수학여행을 우리 때부터 설악산으로 갔는데, 그때 숙소에서 급식으로 나왔던 음식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나는 음식을 한번 쓱 쳐다보고 식판조차 들지 않았다. 나처럼 반 이상의 여학생들이 식판조차 들지 않았지만, 남학생들은 배고픔이 컸던지 그래도 먹으려 애썼다. 학생들의 음식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따로 마련된 선생님들의 음식들은 상당히 먹음직스러웠다. 한쪽에 매 끼니마다 과일이 잔뜩 담긴 접시도 눈에 띄었다.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 때 그 교련선생님이 한쪽에서 여학생들은 배가 불렀다 어쩌다 하며 또 여학생 까내리기를 했다. 난 차분히 그에게 다가가 나랑 밥을 바꿔먹자 했다. 나도 밥 좀 맛있게 배불리 먹어보자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그는 반박조차 하지 않고 선생님들만 머무는 공간으로 내뺐다. 내가 다시 들이받은 기억이 없는 것으로 추측건대, 그 뒤로 적어도 수학여행동안은 여학생들을 깎아내리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딸만 셋이라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여학생을 어떻게든 비하하던 그의 태도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딸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빠의 태도를 알고 있을까? 그는 집에서 어떤 위치였을까? 밖에서 딸들이 자신과 같은 태도의 남자들을 만나서 속상하다는 말을 전하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남자라는 것 빼곤 내세울 게 없어서 생긴 콤플렉스를 위로하기 위한 자신만의 해결책이었을까? 교련이라는 교과목이 그의 태도와 관련이 있었을까? 30년이 다되어가는 이 시점에서도 그가 기억나다니 참 별난 사람이긴 했나 보다. 


돌이켜보면 교련은 이미 없어져야 했을 과목이었는데, 참 더디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는 교련선생님으로 정년을 맞았을까? 다른 교련 선생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재교육을 통해 다른 교과목 선생님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는데, 내 기억 속의 교련 선생님들을 떠올리면 과연 그들이 다른 교과목을 가르칠만한 역량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성실하고 능력이 되는 교련 선생님들도 있었을 것이다만, 내가 겪었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교련수업은 상당히 더디게 사라졌다. 출처: https://youtu.be/1Imk_PlBX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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