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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Mar 08. 2023

딸과 내가 책과 이별하는 법

배경 이미지: 책과 이별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딸이 책 위에 누워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소 때문일까? 왠지 책 판매원 같다.



함께 한 시간만큼 애착을 느끼는 내가 아이들과 함께 한 책을 떠나보내기를 망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끼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책장을 새로 산다고 해도 둘 데도 없는 상황이라 아이들이 아기 때 보던 책을 덜어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냥 버리기엔 아쉬움이 너무 컸다.



아이들이 아기아기했던 시절, 책과 함께한 기억


조카가 아기 때 보던 책을 한국에 갔을 때 별생각 없이 가방 빈자리에 욱여넣었다. 그 책을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함께 읽기도 하고, 아이들이 블록처럼 쌓기도 했다. 벌써 몇 년이 더 되었다고 아들과 함께 한 책에 대한 기억은 아득하다. 어쩌면 아들과 함께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할 시기에 둘째를 낳느라 아들에게 신경을 덜 써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 심한 입덧에 지쳐 미안하게도 아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기억을 끄집어내 보자면, 아들은 한없이 순한 아기였던지라 함께 조용히 책을 봤다. 단지 그림을 더 좋아해서인지 책에 있는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서둘러 책장을 넘기던 아기라 함께 책을 읽었다기 보단 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반면에 딸이 아기 때 함께 책을 읽은 기억은 조금 더 선명하다. 딸에게 책 읽자고 했다가 책을 한 아름 꺼내와 쌓아 놓고 배시시 웃는 딸을 보고 속으로 살짝 기겁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책을 읽어줄 때 자꾸 딴짓을 하는 것 같아 그만 읽자고 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딸은 계속 읽어달라며 울먹였다. 딴짓을 하면서도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나 보다. 책 속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고 우스운 점을 찾아 가리키며 깔깔대며 웃기도 했는데, 아들도 그랬던 것 같다. 숫자세기에 심취해 있을 때는 페이지마다 어떤 것이 몇 개나 있는지 질문을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아들도 똥과 방귀에는 흥미를 보였지만, 딸은 똥과 방귀에 관한 이야기를 유독 더 좋아했다.



정든 책에게 우리만의 이별 고하기


책장을 넘기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쏟아지는 책을 버리는 게 쉽지 않았지만,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책장에서 책을 빼냈다. 그 자린 금세 다른 책으로 채워졌다. 막상 버리려니 망설여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 전후의 연년생 아기가 있는 지인에게 책을 원하는지 물었다. 낡았지만, 핀란드라 한국책을 욕심껏 구하기 힘드니 아기가 그냥 장난감처럼 볼 수 있는 책으로 여기면 좋을 것 같고, 필요 없다 생각되면 맘 편히 버려도 된다고 하자 지인은 일단 책을 받겠다고 했다. 버리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전해준다고 생각하니 맘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도 그냥 보내는 것 같아 아쉬웠다. 딸은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순간 딸에게 책을 한 권씩 읽힌 뒤 보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제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딸에게 한글 공부 겸, 책에 있는 추억과 마주하고 작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딸은 하루에 한 권씩 책을 큰소리로 읽으며 책과의 이별을 준비했다. 때론 딸이나 내가 아파서, 또는 어쩌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책을 안 읽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20권의 책 읽기를 끝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책을 읽던 날, 딸의 성취를 축하하며 1유로를 건네자 딸은 기뻐했다. 


그런데, 갑자기 딸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추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책을 다 보내기 싫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이별을 고했다 싶었는데 이건 또 먼 소린가 싶었다. 딸이 추억으로 한권만이라도 간직하고 싶다고 애원했다. 자신의 추억상자에 보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책을 고르라고 바닥에 펼쳐놓았다. 딸은 '누가 똥 쌌어?' 책이 정말 좋기는 하지만 안에 뜯어진 페이지가 있어 꺼려진다며 다른 책을 살폈다. 그러다가 다시 울먹이며 두권 간직하고 싶다며 애원했다. 책이 좋다는데 어찌하랴 싶어 두 권 만이라는 확답을 듣고 우리의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딸이 고른 책은 '미끌미끌 쭉쭉'과 '빙글빙글 춤을 춰요'였다. 둘 다 엉덩이 이야기가 나오는 책으로 딸의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책들아, 이젠 정말 안녕!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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