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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Mar 29. 2023

돌려받는 걸 걱정해야 하는 전세금

전세금!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박도 아닌데,  잃을 수 있다니...

배경 이미지 출처: Unsplash



언니의 생애 첫 내 집 마련, 전세금 잃을 염려가 없다.


재작년 즈음 언니가 집을 샀다. 언니에 의하며 부동산이 고점을 찍기 직전이었다. 아파트를 살만한 상황이 아니라 투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빌라를 샀다. 내 집마련은 꿈처럼 느껴지는 내게 언니의 내 집 장만 소식은 부럽고 축하할 일이었지만, 용감하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최근 부동산이 하락세라는 뉴스들을 많이 접하면서 아파트보다 선호도가 떨어지는 빌라를 산 언니가 염려되었다. 빌라로 내 집마련을 한 언니의 마음이 여전히 안녕한지를 조심스레 물었다. 상당히 고점에 집을 구매해서 손해가 아닌지 손해라면 억울하진 않은지를 물었다.


언니는 부동산 시세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투자보다는 거주 목적으로 산거라 괜찮다는 자기 위로가 아닌 진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설령 집값이 내렸더라도 계속 전세에 살면서 2년마다 이사에 대한 부담과 전셋값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염려 속에 사는 거보다는 맘 편해서 좋다는 설명이었다. 현재 집을 구매하기 위해 부동산을 돌던 시절, 만약을 위해 전제집도 알아보고 다녔는데, 빌라는 구매가나 전세가의 차이가 없었다고 했다. 전세사기도 많고, 부동산 하락의 여파로 전셋값도 하락해서 전세금 돌려받기가 어려울 수 있는 현 상황에서 약간의 집값 하락은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값으로 치부할만하다는 의견이었다.



오래된 전세금 반환의 기억


오래전 한국을 떠날 때, 오빠와 함께 살던 전셋집이 골칫거리가 되었다. 전세기간 만료 최소 두 달 전 주인에게 이사를 가겠다는 통보를 했지만,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줄 목돈이 없다며,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했다. 전세대란이라는 말이 처음 나돌던 시기였던 2002년 초에 어렵게 구했던 전셋집이라 전세금이 집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전세기간이 만기 될 시점은 오히려 역전세난이 일어나 전셋값이 떨어졌지만, 집주인은 시세는 고려하지 않고, 2년 전의 전세금을 고집했다. 전세금을 낮출경우 그 차액을 메꿔줄 돈이 없다는 핑계였다. 아주 급한 상황은 아니라 기다렸지만, 남의 일인 듯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집주인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게다가 여름이 지나면서 내가 해외로 나가기로 마음먹으면서 내 이름으로 계약된 전세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사실 전세금은 내 돈이 아니고 아빠의 돈이었다.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욕심만 부리는 집주인도 짜증 났지만, 혹시나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하는 염려로 계속 나를 탓하는 아빠의 태도도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집을 빼겠다는 이야기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 생긴 일이 아닌지, 언젠가는 돌려주겠지라고 생각하며 마냥 기다리는 건 아닌지 등등 시시때때로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억지 미소를 짓는 곤욕을 겪고 있는 내게 아빠의 잔소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시세에 맞춰 집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을 건넸지만,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집을 구할 때 이용했고 집주인이 전세를 내놓기도 한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주인에게 전세금을 낮춰 세입자를 구해야 한다는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고 몇 번 부탁하기도 했다. 


집을 구하고 이사하는 걸 부모님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 친구들과 달리 아빠는 전화로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현실과 거리가 먼 요구까지 하면서 나의 집 구하기 난이도를 높인 전적이 있었다. 처음 혼자 살던 원룸을 구할 때 전세권설정등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 집을 구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아빠의 전화 닦달이 심해지자 그때의 악몽까지 떠올라 나는 결국 폭발했다. 말로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다른 부모님들처럼 직접 나서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했다. 혼자 할 만큼 했는데 20대라고 무시하는 집주인에게 멀 도대체 더 해야 하냐며 화를 내자 아빠가 움직였다. 서울로 올라와 집주인을 만났으나, 집주인의 나몰라는 아빠라고 다르지 않았다. 


말로는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그리 설명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던 아빠는 본인이 직접 당하자 바로 다른 해결책을 모색했다. 진작 아빠에게 화를 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친척 어른인 변호사님께 조언을 구해 전세금 지급명령이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변호사님과 함께 지급명령 서류를 작성했다. 지급명령을 받은 집주인은 소송을 해도 되는 상황이지만, 내가 돈이 진짜 필요한 것 같으니 전세금을 융통해 주겠다며 인심을 쓰는 척했다. 지급명령을 받아서 법정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마치 은혜를 베풀어주는 척하는 태도는 매우 맘에 들지 않았지만, 전세금만 돌려받을 수 있다면 집주인의 쓸데없는 거만함은 참아줄 수 있었다. 집주인의 말도 안 되는 태도 덕에 아빠가 변호사님과 함께 소송으로 번질 경우까지 감안해서 지급명령을 청구한 것이었기에 집주인의 태도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당시 법정이자가 지금의 법정이자인 12%보다 훨씬 높았다. 이자가 만만치 않은 덕에 집주인이 전세금을 최대한 빨리 돌려주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법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사람 간의 일이었기에, 아무리 이자가 부담이 돼도 전세금이라는 큰돈을 바로 마련할 수 없는 집주인의 사정과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할 우리의 사정을 고려해 일정기간 뒤에 전세금을 돌려받기로 합의를 했다. 지급명령 뒤 합의한 기간까지 전세금을 돌려준다면 법정이자는 받지 않기로 했다. 전세금을 돌려받고 싶은 거지 전세금으로 돈을 벌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 약속과 함께 나는 한국을 떠났고, 그 뒤에 나 없이 언니와 오빠가 전세금을 돌려받고 새로 구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연초에 계약 만료였던 집을 11월이 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만약 집주인의 고집대로 마냥 기다렸다면 그 집에서 이사 나오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다 지나간 옛일이지만, 그 시절의 집주인에 대한 짜증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임대 관련 분쟁, 핀란드는?


핀란드에서 헬싱키학생아파트와 헬싱키시립아파트에만 살아본 나는 집주인과 큰 부딪힘이 없었다. 학생아파트 시절 아파트 벽의 방수 문제와 아파트 전체 레노베이션 문제로 강제 이사를 두 번 해야 했지만, 약간의 항의로 비교적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얻어냈다. 그러나 간혹 집주인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는 경우를 전해 듣긴 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주로 핀란드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횡포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핀란드는 전세 제도가 없어서 한국처럼 전세금을 날릴 염려는 없다. 일반적으로 집을 임대할 때 월세의 두세 배에 해당하는 보증금을 요구하는데, 이는 월세가 밀리거나 세입자가 집을 망가트렸을 때 복구를 위한 목적이다. 보증금은 집주인을 위한 공돈이 아니고 예비비이기 때문에 집주인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보증금을 의도대로 보호하고 싶은 세입자를 위해 보증금용 은행 계좌를 따로 개설할 수도 있지만 애용되는 것 같진 않다. 핀란드에도 한국처럼 세입자가 이사 갈 때 간혹 보증금을 떼먹고자 애쓰는 집주인이 있다.


좋은 위치의 넓은 집이었지만, 오래돼서 낡은 집에 살던 한국인 지인이 핀란드를 뜨면서 보증금을 왕창 뜯겼다. 원래 낡은 집인데 급하게 떠야 하는 지인의 사정을 알던 집주인이 지인이 집을 망가트렸다고 억지를 부리며 보증금에서 집수리비를 제하고 돌려줬다. 핀란드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하는 지인의 상황 때문에 지인이 싸울 여력이 없다는 걸 알고 저지른 만행이었다. 지인이 만약 핀란드에 계속 머물었다면 관련 단체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추천하고 싶었으나, 지인은 그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만약 지인이 싸울 여력이 되었다면 관련 법이나 공정한 임대관행을 살펴보고 핀란드세입자협회에 문의를 해보라고 했을 것이다. 핀란드세입자협회는 세입자를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임대 관련 상담을 제공한다. 협회는 1년에 37유로의 회비를 내고 멤버가 되면 무료 전화상담과 함께 한 달에 두 번 무료 변호사 상담도 가능하다. 세입자가 피해자일 수도 있지만, 집주인이 피해자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를 위해 핀란드집주인협회도 존재한다. 


핀란드는 집을 임대하는 것도 상품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핀란드 경쟁 및 소비자당국과 소비자협회가 웹사이트에 임대 관련 안내 페이지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관련 상황에 대한 문의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단체의 도움에도 불고하고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소비자분쟁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이 단체의 결정은 법적 효력을 가지진 않지만, 법을 기반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분쟁이 법정까지 가게 되더라도 비슷한 결과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부담스러운 법정 다툼 전에 소비자분쟁위원회에서 분쟁이 해결되는 사례가 다수다.



단체 만들기, 함께 모여 한 목소리 내기 어때?


한국이나 핀란드나 못된 욕심을 부리는 집주인은 있고, 때로는 그들이 부당한 이득을 챙기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한국은 사람이 많은 만큼 무언가 더 복잡하게 느껴지고 위험성도 핀란드보다 더 높은 듯하다. 그런데 핀란드는 정부가 세세하게 신경 쓸 수 없는 부분을 이익 당사자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어 덩치를 키워 서로를 보호한다. 약자들이지만 모여서 강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정치에 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입자와 집주인을 위한 단체는 물론이고, 특정 질병에 관련된 단체는 병원에서 제공해주지 못하는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을 나누고 정신적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돕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임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편한 환경을 위해 정부를 압박하고, 사람들에게 자전거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다. 정부가 세세히 신경 써주지 못하는 부분을 이런 단체들이 해결해 준다. 


한국은 신기하게도 힘 있는 사람들만 잘 모인다. 약자들은 모이는 경우도 드물고, 어렵게 모여도 그 모임을 와해하려는 세력도 상당하고, 모임을 지속하는 힘이 매우 부족하다. 게다가 엉뚱한 사람들이 모여 관련 없어 보이는 주제로 단체를 만들어 정부지원을 받아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검색해 보니 한국에도 세입자협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활동이 미비해 보인다.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나 세심하게 모두를 챙길 수 없다. 정부가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을 세입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가 채워줘야 하지 않을까? 집주인과 문제가 생겼을 때 집안 어른이나 지인이 아니고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전문단체가 있다면 약자인 세입자에게 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물론 정부는 무분별하게 단체가 난립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멀리서 한국의 전세 관련 암울한 뉴스들을 접하며 예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고 느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된 듯했다. 세입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체계적으로 활동해 왔다면 어땠을까? 빌라왕 전세사기와 같은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적어도 피해는 줄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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