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의 도시 (1)
#027. 제물의 도시 (1)
이야기가 드디어 끝났다.
연달아 세 이야기를 끝낸 여래는 안도감과 더불어 또 다른 긴장과 불안을 느껴야 했다. 겨우 이야기를 연속해서 만들었건만, 남자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아니, 변화가 없는 건 표정뿐이고 눈에는 약간 빛이 돈 것도 같았다. 유심히 남자의 얼굴을 주시하던 여래는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냈다.
“네가 말한 이야기들은 꽤 흔한 소재에서 따온 것들이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남자는 여래에게 흔한 이야기가 아닌 오싹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요구했었다.
그래서 여래는 어떤 식으로든 남자의 요구에 충족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여래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남자의 마음을 충족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버릇처럼 검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
고요한 침묵과 함께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음만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여래의 불안이 더욱 커져갔다.
과연 난 이 남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방을 탈출하고 사람들에게 구조 요청을 할 수 있을까?
문득 여래는 지금 자신의 목숨줄이 생전 처음 보는 저 남자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래가 이 상황을 바꿀 힘이 있는 건 아니었다.
더 냉정하게 차분을 유지하며 상황을 봐야 한다. 여래가 남자의 변화를 하나라도 더 빨리 캐치하기 위해 그를 지긋이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결말은 제법 나쁘지 않군.”
순간 테이블을 두드리는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여래는 흠칫 놀랐다.
- 이 남자는 내가 한 이야기들이 맘에 들었던 걸까?
남자가 워낙 무표정한지라 여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윽고 아무 일 없이 몇 분의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너무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는 아니면 좋겠어.”
여래는 자신의 몸이 다시 긴장하는 걸 알았다. 남자가 다시 여래에게 이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는 남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현실과는 다른 배경의 이야기를 원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이야기를 원하고 있었고, 그건 여래에게 약간의 유예 기간이 늘어난다는 반증이었다.
- 후….
그래도 여래는 안도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새로이 짜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 그 이야기가 남자의 마음에 들어야 여래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 이건 꼭 시험을 치르고 바로바로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여래는 저도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이야기를 요구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여래에게 성급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을 당장 어떻게 할 필요는 없으리라.
일단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남자는 여래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래는 판단했다. 그리고 남자는 약간의 기다림은 견딜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 남자가 테이블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할 즘, 여래가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그 도시는 평화로운 질서로 돌아가며 구성원들끼리의 다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유토피아 혹은 멋진 신세계와 같은 곳. 준은 가까운 인간으로부터 그 도시의 존재를 주워 들었다. 그 도시의 법규는 엄격했으며 사람들은 알아서 그 도시의 질서에 순응한다. 되도록 사회에 누를 끼치지 않게 자기 직분에 충실하도록 노력한다. 도시의 범죄율은 낮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겠냐 하지만은 그 도시는 존재했으며 준을 제외한 또 다른 여행자들이 그 도시와 도시의 생리를 자신의 저서로 입증했다.
이번에 도시로 들어온 여행자인 준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다른 여행자들이 일러준 대로 그 도시를 찾아간 여행자인 준은 그 도시에 발을 디디는 순간 도시의 입구 가까이에 있는 너른 공터에 마치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듯한 돌무더기를 보았다.
어디 공사라도 하기 위해 모아놓은 건가?
무언가 단정한 도시의 입구를 의도적으로 망치는 것 같아 의아했다.
공사를 하여 도로를 넓히든 건물을 짓든 빨리 치워버리는 편이 자신 같은 여행자는 물론이요, 이 도시의 주민들을 위해서라도 좋을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돌무더기에서 눈을 돌리려던 준은 뭔가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분명 지인들은 그 도시가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질서에 순응하는 주민들이 사회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 살아가는 도시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저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준은 처음 자신이 본 것을 의심했다. 뭔가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 흔히 있을 법한 마네킹이나 사람 모양을 흉내 낸 인형 같은 것이 볼품없게 버려진 것 같았다. 저런 공사용 돌무더기를 모아놓은 것에는 늘 있을 법한 일이라며 준은 처음엔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눈에 들어온 그것이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준의 머리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준은 결국 뇌에서 일어난 의문과 반발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다시 돌무더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확인했다.
저것은 시체다.
돌무더기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버려진 저것, 산더미 같은 돌 아래 깔려서 비죽 팔 일부만 덜렁 튀어나온 저것은 분명 사람의 손이다.
그것도 죽은 지는 좀 오래되었을 법한.
그것을 목격한 준은 기겁하여 도시 안쪽으로 달려갔다.
살인사건이 난 건가? 혹시 갱단이 사람을 죽여서 저런 데 유기한 걸까?
지인들에게 들은 도시의 이미지와 영 맞지 않는 시체의 모습에 준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준은 여행을 여러 번 했고 위험한 일도 겪기는 했으며 때로는 목숨이 위험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많아진다고 해서 위험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까딱 잘못 판단하거나 방심을 하면 암만 노련한 여행자라 하더라도 찰나에 목숨을 잃는 수가 있다. 어떤 경우는 죽는 것이 낫다는 일도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준은 여행을 하는 동안 지나치게 마음을 놓거나 한눈을 팔지 말자고 스스로 이르곤 했다.
준은 생각했다.
이런 정돈된 도시에서, 특히 평화롭다고 소문이 자자한 도시에서 시체가 보란 듯이 널브러져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상하다고.
그래서 준은 더 겁에 질렸다.
준은 한때 자신의 고향에 존재했던 범죄가 없다며 자랑하던 마을의 실상을 기억했다. 사람이 사는 곳에 범죄가 없을 리 없고 대개 범죄가 없다고 자랑한다면 그건 진짜 범죄가 없어진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저 이미지를 위해 침묵하거나 애초에 범죄라 할 만한 행동을 잘못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쩌면 이 평화로운 도시, 유토피아 내지 멋진 신세계 같다는 이 도시도 비슷한 곳인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질서 정연한 겉모습 뒤에 암울한 뒷배경을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며, 다른 치안 나쁜 도시처럼 갱단이나 범죄자들이 보이지 않게 설치는 곳인지도 모른다고 준은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준이 발을 디딘 이곳이 치안이 나쁜 슬럼가일지도 모른다. 준은 부리나케 그 지역을 벗어나 사람이 많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경찰서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이며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리가 나타났다. 묘하게 무채색 색상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준은 위험을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준은 자신이 본 것을 그냥 놔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이미지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준의 양심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고 준은 경찰서로 추정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고를 접수하는 경찰관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방금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놓았다. 최대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당황스러움과 불안이 말에 밀려 나왔다.
“저, 저기 도시 입구에 사람 시체가 깔려 있는 걸 봤어요. 누군가가 시체를 숨기려 한 것 같아요.”
경찰관은 허둥지둥 말을 꺼내는 준을 보며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이 도시엔 처음 오셨죠.”